[중국 천하통일 32] 순자와 맹자, 같은 점 다른 점

맹자(왼쪽)와 순자 <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맹자가 다니면서 왕들 앞에서 즐겨 하던 말들은,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왕께서는 어찌하여 이익 따위를 말씀하십니까? 오로지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등이다. 이는 사실 일종의 어리광이다. 약한 나라의 왕들이 그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으면 제 아무리 맹자라도 그렇게 못한다.

그러나 순자는 아니다. 순자는 대단히 현실주의적이며, 현대적이다. 순자는 맹자가 철저히 부정하는 이익을 말한다. 그것은 현실의 패도覇道들에게 어필하고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다” 하는 것까지는 둘이 비슷한데, 순자는 이런 식이다. “아기가 어버이를 따르는 이유는, 울면 당장에 부모가 달려와 안아 주고 젖 먹여 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먼저 부모가 아기를 만족시킴으로써 유대감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가족애로 발전되는 것이다. 결국 부모자식간의 특별한 관계라는 것도 사실상 특별한 이익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익을 따르고, 무언가 얻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의 정情이요, 성性이다.”

맹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치워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은 도둑놈이다. 죽여 버릴 수도 있다” 등등 대스승 공자도 하지 못한 험악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인물이다. 나아가서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신(神)따위는 갈아치워야 한다”라는 말도 한다.

모든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군주와 종교 권위의 정당성이 어디까지나 백성에게 있다는 말이다. 맹자가 항상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식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올바른 목표를 설정하고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그 본성을 선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맹자의 성선설과는 정반대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인간의 선함은 후천적이며 인위적인 교육의 결과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한다. 그런 본성을 따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다투며, 질서나 도덕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하고, 예의에 따른 교화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본성을 억제하는 힘이 생기고, 질서나 도덕을 되찾아 세상이 편안해진다.

옛날의 성인은 백성을 감독하고 교화하기 위해 군주의 권력을 내세워 예의를 설파했다. 또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백성을 통제하기 위해서 형벌을 내렸다. 그리하여 백성은 모두 규율을 잘 지키는 선량한 인간이 된다. 만일 군주의 권력도, 예의에 의한 교화도, 법에 의한 지배나 통제도 없고, 군주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백성의 생활을 방관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 살게 굴고, 무리를 지은 다수의 힘이 선량한 사람을 괴롭혀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성이 정의와 질서에 합치한다면 성인이 왜 필요하며, 법이 무슨 소용인가? 예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순자의 제자 두 사람이 전국시대의 법치주의 법가의 최고봉인 이사와 한비자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순자는 자연의 작용을 천명(天命)이라 보면서, 인간이 감히 손댈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주체적으로 자연에 작용해 그것을 이용하라고 말한다. 깨어 있는 인식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

하늘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 요(堯)와 같은 성왕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걸(傑)과 같은 폭군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계에 길흉이 있는 것은 인간 자신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에게 하늘은 가난을 줄 수 없다. 먹을 것을 가리고 적절한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하늘은 질병을 줄 수 없다. 반대로 사치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에게 하늘은 부귀를 주지 않는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적절한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늘은 건강을 줄 수 없다.

하늘이 내려 준 같은 조건 아래서도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나라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그것은 하늘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사람의 도리에 따라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사계절의 변화가 있고, 땅에는 물질을 생산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 두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제각기 다른 역할을 가짐으로써 우주의 질서는 유지된다.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잊고 천지와 나란히 서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진정한 지혜란 인간의 영역을 넘지 않고 절제할 줄 아는 것이다.

하늘을 가장 위대한 존재로 생각하고 따르기보다는 하늘을 물질로 생각하고 이용하는 편이 낫다. 하늘에 순종하며 그것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천명을 인간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 낫다. 사계절이 순조롭게 운행되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계절의 변화에 대비하고 응용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낫겠는가. 인간의 힘을 망각하고 하늘에 순종하기만 하면, 만물의 실제적인 모습을 모르게 된다.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해서 겨울을 없애지 않고, 인간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해서 땅을 줄이지도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군자는 소인의 입이 흉흉하다고 해서 도덕적 실천을 그만두지 않는다. 하늘과 땅에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군자에게도 불변의 도덕이 있다.

군자는 인간의 능력을 믿고 하늘에 기대지 않으려 하지만, 소인은 인간의 능력을 믿지 않고 하늘에 기대려 한다. 군자도 소인도 더 잘살기를 바라는 것은 똑같으나, 군자는 하루하루 진보하고 소인은 하루하루 추락한다.

어찌 됐든, 이러한 순자의 주장은 후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유학의 본령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렇기에 맹자와 후대 유학자들의 관점에서 순자를 평가하면, ‘천하를 도탄에 빠트릴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유학자들이 유학을 파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하를 도탄으로 부터 건져내기 위함인데, 여기에서 위험성을 내포한 순자의 사상은 그 자체로 학문의 존재의의를 상실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현명한 자는 순자의 현실과 맹자의 도리를 적절히 구분해서 따라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대의 중국이 가는 길은 순자의 현실의 도이다. 공맹의 이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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