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8일] 백범 살해범, 그 자신도 맞아 죽어

1997 이란 강진으로 3000여명 사망

1997년 2월28일 이란의 북서부 아르데빌 인근 산악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5.5를 기록한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은 이날 오전 2시8분경 이란­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 발루치스탄주(州)의 주도인 퀘타에서 113㎞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니르와 사레인 및 아르데빌 인근 110개 마을이 파괴됐고 수천마리의 가축이 희생됐다.

지진 발생 후 경찰과 국제적십자사연맹 대원 등으로 구성된 4000명의 구조대원들이 구조활동을 시작했지만 강풍을 동반한 폭설로 구조작업에 어려움을 겪어 30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첫 지진 뒤 약 200차례의 소규모 여진이 있었고 이틀 뒤인 3월2일 오후 10시 리히터규모 5.2의 강력한 지진이 다시 발생, 전력공급이 모두 단절됐고 집이 무너져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1994년 이스라엘-PLO 대립

1994년 2월28일 당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의 역사적인 평화협정이 조인 다섯달 만에 백지화 위기에 봉착했다. 사흘 전 과격파 유대교도인 30대 이스라엘 의사가 사원에 난입, 무차별 총격을 가해 63명의 무슬림이 숨지고 230명이 다쳤기 때문.

PLO 과격파는 즉각적인 보복을 선언하고 곳곳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충돌한다. 평화협정을 착실하게 이행해나가던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의장은 곤경에 몰린다.

이틀 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포로 1000명을 석방하고 과격 유대 지도자 체포령을 내리는 수습책을 내놓는다. 아라파트 의장은 이스라엘의 조처가 미흡하다고 비난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구한다. PLO의 항의시위는 계속됐고, 55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92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백범 묘소 참배

1992년 2월28일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씨가 3.1절을 앞두고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내 김구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안씨는 묘소앞 대리석제단에 30여분간 엎드려 오열했다. 참배 뒤에도 10여분 동안 묘소 앞 잔디밭에 누워 흐느꼈다.

안씨는 당시 “전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며 “그러나 범행 당시 배후는 없었으며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부인했다. 안씨는 당시까지 네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고 밝혔다. 안씨가 김구선생 묘소를 참배한 것은 1949년 김구선생 암살이후 세 번째다.

안두희는 1949년 6월26일 정오께 경교장에 찾아가 총으로 김구를 암살했다. 특무대에 연행돼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됐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년 6월27일)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했다.

이런 감형 탓에 이승만의 지시에 의한 범행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었다. 안두희 스스로는 1992년 4월13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백범 암살의 배후는 전 육군 소장 김창룡”이라고 증언했다가 수차례 번복했다.

1960년과 1961년 여러 차례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했다.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1987년 3월28일 민족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돼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백범 김구 선생을암살한 안두희를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한 박기서씨.

수 차례 테러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던 안두희는 1996년 10월23일 밤 그예 피습당해 사망했다. 이날 오전 11시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 기사였던 당시 46세 박기서에게 몽둥이에 여러 차례 맞아 살해당했다.

당시 몽둥이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평소 백범 김구를 매우 존경하던 박기서는 김구를 사살한 안두희를 응징할 기회를 노리다가 안두희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박기서는 1997년 범행 동기가 정상 참작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8년 3·1절 특별사면이후 일주일이 지난 후인 1998년 3월8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됐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 삼척동자도 뚜렷하게 짐작할 수 있는 증거는 이미 여럿 공개돼 있지만,?독립운동 지도자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영구 미제사건’이다.

1986년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 암살

1986년 2월28일 스웨덴의 총리 스벤 올로프 팔메(Sven Olof Joachim Palme, 1927년1월30일~ 1986년 2월28일)가 가족과 함께 극장에 가던 중 큰길가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팔메는 1969년부터 1986년까지 사회민주당의 당수였으며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특히 미국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을 강도 높게 비판, 미-스웨덴 양국 간 외교에 찬물을 끼얹은 비판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1969~1976년까지, 1982~1986년까지 두 차례 총리를 지냈다. 핵확산 방지 캠페인을 전개하고 아프리카와 팔레스타인에도 정치적, 재정적 도움을 줘 ‘제3세계의 평화대변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사후 <올로프 팔메 상(賞)>이 제정될 정도로 그의 생전 칭송이 자자했다.

지구촌의 패권자가 아니라면, 지구촌 약자들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를 누가 죽였겠는가.

1947년 타이완 ‘2.28 사건’ 발생

1947년 2월28일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 본토인의 시위를 무력 진압,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른 바 중국 동족간의 학살극이었던 ‘2ㆍ28사건’의 순간이었다.

1945년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대만을 중국에 반환함에 따라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천이(陳儀)를 대만의 행정대표 겸 경비사령관으로 현지에 파견했다. 당시 일본은 항복선언 이후 대만통치에서 사실상 손을 떼 대만은 행정 및 치안 공백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나온 것이 ‘2ㆍ28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은 정부의 단속반이 밀수담배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촉발됐다. 밀수 담배를 팔던 시민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행인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 수천명의 군중이 전매청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공매국을 파괴했고 이어 소요는 전국으로 번졌다.

당시 사건을 주도한 임헌당 등 대만 지식인들은 그해 3월 2일 ‘2ㆍ28사건’ 처리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금지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촉구했다. 천이는 중국의 국민당군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어 3월9일 대만 북부 기륭에 진주한 국민당 21사단은 1주일 만에 소요를 진압했다. 2.28사건 처리위의 주요 간부들은 대부분 체포돼 상당수는 처형됐다.

미국무부는 당시 작성한 <중국백서>에서 “신임장관(천의)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했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중략)….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했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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