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내 가족 식비도 월급으로” 문재인 대통령 결정의 롤모델 두 사람

민병돈 장군(왼쪽), 故한기택 판사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25일 이정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발표다.

“앞으로 대통령의 공식행사를 제외한 가족식사 비용, 사적 비품 구입 등은 예산 지원을 전면 중단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앞으로 공식회의를 위한 식사 이외의 개인적인 가족 식사 등을 위한 비용은 사비로 결제하게 됩니다. 이는 국민의 세금인 예산으로 비용을 지급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경우를 명확히 구분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다운 결정이다. 공직사회에 적지않은 정풍(正風)과 선풍(?風)이 불 것 같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인과 분리된 조직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군의 경우 士兵을 私兵 부리듯 하는 지휘관이나 간부가 꽤 있었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 결정의 ‘배후’쯤으로 여겨지는 두 분을 소개한다. 민병돈(82) 예비역 중장과 고 한기택(1959~2005) 판사다.

육사 15기로 1959년 소위로 임관한 민 장군은 소대장·중대장·대대장·사단장·특전사령관·육사교장 등 7~8차례의 야전 지휘관 근무 중 공과 사를 가장 철저히 구분한 군인 가운데 한명으로 지금껏 꼽히고 있다. 20사단 때의 일이다. 그의 고교 동창 몇 명이 사단사령부를 방문해 만찬을 같이 했다. 행사 후 민 장군은 식사담당 선임하사를 불러 만찬에 들어간 비용을 묻고 자신의 지갑에서 꺼내 전했다. 사단장 시절 이전에도, 이후에도 늘상 그래왔다.

60년 다 된 소대장 시절의 백발 성성한 80대 부하들과 특전사 대대장 시절의 60대 후반 부하들이 여태껏 민 장군을 찾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은 민 장군이 1공수여단 2대대장을 마친 후 1대대에 이등병으로 전입했다. 민병돈 장군의 한 부하 하사관은 “민병돈 장군은 철두철미하게 솔선수범하며 훈련시켜 타 대대에서도 유명했다”며 “민 장군이 떠난 뒤에도 그에 대한 얘기가 오랫동안 회자돼 문 대통령도 군 복무 중 (민 장군에 대해) 잘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후배·동료들에게 ‘민따로’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민병돈 장군의 전 재산은 42년 전 지은 목동의 50평 단독주택과 연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결정에 또다른 롤모델이 됐을 만한 사람은 2005년 여름 숨진 한기택 전 대전지법 부장판사다.

한기택 판사는 재직 시절, 가족을 단 한번 관용차에 동승시키지 않을 정도로 공사간 명확한 경계를 그었다. 언론인이던 가까운 지인이 개인적인 청탁을 하자 바로 인연을 끊을 정도였다.

1986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원, 서울고등법원 판사 및 대법원 재판연구관,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등을 지낸 그는 1988년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강금실, 김종훈, 이광범 판사 등과 함께 우리법연구회를 창립했다.

그는 2002년부터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면서 △법무부가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배우자에 대해 중국에 두고 온 성인 자녀의 한국 초청을 막는 것이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에 어긋난다는 판결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육군 모 포병부대 이등병 엄모씨에 대해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판결 △고위공직자 재산등록 때 해당 공직자의 직계 존·비속이 재산등록을 거부할 경우 거부 사유와 거부자의 이름을 공개하라는 판결 등을 내렸다.

2005년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었으나 그 해 7월 휴가지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는 지금껏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내가 그 무엇(고등법원 부장판사)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진정한 판사로서의 삶이 시작될 것으로 믿는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민병돈 장군, 한기택 판사 같은 분들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삶이 문재인 대통령에 와서 비로소 결실을 맺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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