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 33] 베트남① 모자·강승회·지강양접 ‘3인방’ 초기불교 개척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혜가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베트남의 역사·지리

[아시아엔=이병욱 고려대·중앙승가대·동국대평생교육원 강사, <천태사상연구>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저자]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위치하며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와 인접해 있다. 사회주의공화국인 베트남의 국토 면적은 33만 1,690㎢로 한반도의 약 1.5배, 인구는 8580만명(2009년 기준)이다.

베트남 민족은 베엣(Viet)족이 89%를 차지하며, 그 외 53개의 소수민족이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화교는 약 100만명 정도다. 베트남의 공용어는 베트남어이고, 4종류의 소수민족 언어를 법률로 허용하고 있다. 베트남 문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한자를 사용하였지만, 8~9세기경에는 한자의 뜻과 음을 차용해서 쯔놈(Chu Nom) 문자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그 후 17~18세기 말에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쯔놈으로 된 베트남어를 라틴문자로 옮겨 적기 시작한 것이 현재 베트남 문자의 효시다. 1878년 4월 6일 프랑스 식민정부가 현재의 베트남어를 국어로 공인하였다.

베트남을 월남(越南)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대 중국에서 월(越)나라 남쪽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사용한 이름이다. 기원전 4세기경 저장(浙江) 성에 있던 월나라가 멸망하자, 월나라의 여러 부족은 남방으로 이주했다. 그 가운데 일부가 베트남인이 되었다.

기원전 111년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토벌되어 베트남은 일찍부터 한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10세기까지 천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907년 당(唐)나라가 멸망한 것을 계기로 베트남은 독립의 기회를 얻었다. 939년에 오조(吳朝, 응오, 939~968)가 성립하였고, 그 뒤로 정조(丁朝, 딩, 968~980)와 전여(前黎, 띠엔레, 980~1009) 왕조가 이어졌지만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이공온(李公蘊)이 이조(李朝, 리, 1009~1225)를 개국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이조의 뒤를 이은 진조(陳朝, 쩐, 1225~1400)는 한층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진조(陳朝)는 세 차례 몽골군 침입을 받았지만, 모두 물리쳤다.

15세기초에는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베트남을 정복했다. 하지만 여리(黎利)가 반란을 일으켜 10년에 걸친 항전 끝에 명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독립을 회복했다. 후여(後黎) 왕조가 18세기까지 지속되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는 1세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고, 1773년 서산당(西山黨)이 군사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베트남 전역을 장악하였다. 완복앙(阮福殃)이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서산당(西山黨)을 물리치고 1802년 완조(阮朝, 응웬)를 세웠다.

1883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고, 1954년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1975년에는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불교의 전래와 수용

전통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은 <이혹론>(理惑論)의 저자 모자(牟子)가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중반 사이에 베트남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렇지만 모자 이전에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승려가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초기 베트남불교에서 활동한 3명의 인물을 소개한다.

① 모자(牟子)

모자는 중국 남부 창오(蒼梧)에 머물다가, 184년경 어머니와 함께 베트남의 교지(交趾, 交州)로 왔다. 당시 베트남의 교지는 태수 사섭(士燮, 137~226)의 통치 아래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모자는 전란(戰亂)을 피하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중국 산둥성 출신인 사섭은, 일남군(日南郡)의 태수였던 아버지 뒤를 이어 독립정권에 가까운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권력자였던 사섭이 학문을 사랑하고 학자를 보호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피난 온 학자가 많았다.

베트남 교지에 머무르고 있을 때 모자는 유교를 주로 연구했는데, 그가 저술한 <이혹론>은 유교 입장에서 늙지 않고 오래 산다는(不老長生) 술(術)을 행하는 도가(道家) 등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불교의 올바름을 말하는 한편, 당시 승려의 타락을 비판하고 있다. <이혹론>에는 태자 수대나(須大拏)에 관한 기술이 들어있는데, 이는 베트남에 불교를 처음 전한 인물이 모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수대나 태자에 관한 기술은 247년에 중국 오나라에 들어간 강승회(康僧會)의 <육도집경> 번역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모자 이전에 이미 불교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중반의 중국 남부에는 아직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모자가 베트남의 교지에서 불교를 배우고 중국에 돌아가서 그 뒤에 불교에 집중했을 가능성도 있다. 모자가 중국 남부의 창오(蒼梧)에 일시적으로 갔다 다시 돌아와 베트남의 교지에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그가 베트남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것은 아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출신의 승려가 모자 이전부터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한문 불교도 그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②강승회(康僧會)

강승회(?~280)는 베트남의 교지에서 공부한 승려다. 강승회의 선조는 서역의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대대로 인도에서 살았는데, 그의 부친이 상업에 종사하기 위해서 교지로 이주하였다. 강승회는 10대 초에 부모를 여의고, 출가한 뒤 그에게 불교를 가르쳐주던 스승도 입적했다. 그는 베트남의 교지에서 여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남양(南陽)의 한림(韓林), 영천(潁川)의 피업(皮業), 회계(會稽)의 진혜(陳慧)다. 그는 불교와 유교 이외에도 천문과 그 밖의 방술(方術)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강승회는 247년에 중국에 건너가서 오나라 수도의 건업(建業)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불교를 포교하였을 때, 출가한 승려를 처음 본 사람들이 그의 복장과 행동에 놀라서 관청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강승회는 일심으로 향을 사르고 예배를 되풀이해서 부처의 사리가 오나라에 나타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오나라 손권(孫權, 222~252 재위)이 이러한 기적에 감동해서 오나라 최초의 사찰 건초사(建初寺)를 세웠다고 한다.

강승회는 건초사에서 <아난염미경> <경면왕경> <찰미왕경> <범황왕경> <소품반야경> <육도집경>(석가모니의 전생담을 집대성한 것) <잡비유경>(교훈집) 등을 번역하고 <안반수의경>(禪經에 속함)에 주석을 달았다. 이 가운데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 <경면왕경>(鏡面王經) <찰미왕경>(察微王經) <범황왕경>(梵皇王經)은 <육도집경>(六度集經)의 일부다. 강승회는 아난염미경·경면왕경·찰미왕경·범황왕경을 베트남에 있는 교지에서 번역하고, 중국에 갔을 때 이 4가지 경전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을 번역하고 편집해서 <육도집경>이라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승회는 범패(梵唄)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③지강양접(支疆梁接)

지강양접은 중앙아시아 월지국(月支國) 출신이다. 255~265년 사이에 베트남에 있는 교주(交州)에서 <십이유경>(十二遊經)과 <법화삼매경>(法華三昧經)을 번역하였다. <십이유경>은 266년 중국 남부의 광주 번우(番?)에서 강양루지(疆良婁至)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지강양접(支疆梁接)과 강양루지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며 지강양(支疆良)도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따라서 앞의 경우처럼 베트남에 있는 교주에서 <십이유경>이 번역되었다면, 베트남에서 번역된 경전이 중국에서 유통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의 경우는 중국의 번우에서 <십이유경>이 번역되어 유통된 것이다.

또 <법화삼매경> 번역자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이 있는데, 285년 무외삼장(無畏三藏)이 베트남에 있는 교주에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화삼매경> 내용을 살펴보면, 베트남불교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법화삼매경>에는 이행(利行)이라는 여성이 설법하였는데, 그것을 괴이하게 여긴 사리불(舍利佛)과 문답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유마경>에서 천녀(天女)와 불제자(佛弟子)의 문답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상당히 가까운 내용인데, 여인성불(女人成佛)의 설명이 필요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상층계급의 여성으로서 불교신자가 된 사람이 많으며, 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불교를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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