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아 상사 “특전사 첫 여군 주임원사 될 것”

‘도전’이라는 화두로 인터뷰를 제안하자 그녀는 대뜸 “내 삶 자체가 도전”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여군을 ‘별난 여자’ 쯤으로 여겼던 지난 1990년 군복을 입기 시작해 20여년을 특전사 부사관으로 살아온 그녀.

전무후무한 여군 최초 천리행군을 완주하고 전쟁의 잉걸이 도사린 이라크와 레바논에서 한국군의 위상을 높인 파란만장한 삶은 그녀의 말 맞다나 도전의 연속이었다. 2011년 세밑, 새해면 임관 22주년을 맞는다는 9공수 특전여단 김정아 상사를 만났다.

왈가닥 여고생, 특전사 부사관의 길에 들어서다

“꼭 군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뭔가 직업이 필요했고, 주변의 권유가 큰 원인이 됐죠. 생각해보면 우연이 필연이 된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정아(41) 상사가 여고 졸업반이던 지난 1990년, 진학 상담을 하던 김 상사의 당시 담임은 돌연 특전사 부사관 지원을 제안했다. 본인도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하고 싶었으나 시력이 좋지 않아 포기했노라 고백했다는 담임교사는 내심 김 상사를 여군에 적합한 인물로 점찍어두고 있던 터였다.

“제가 좀 남자 같은 성격이었어요. 공부는 못했지만(웃음) 당시 이미 태권도가 3단이었고 친구들이 어려운 일에 처하면 나서서 해결하는 게 제 몫이었죠. 골목대장 같은 역할이랄까요? 담임선생님은 아마 그런 제 모습에서 군에 어울리는 어떤 것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제안을 받고도 김 상사는 그리 깊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여자가 군대에 간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고,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보는 시각도 많았다. 더군다나 특전사라니. 여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행정업무만 담당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결심을 굳히게 된 일이 일어났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했던가, 그녀의 한 친구가 여군이 될 것을 선언했고 김 상사도 친구를 따라 부사관에 지원하게 된 것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꿈도 못 꿨어요. 막연히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죠.”

그렇게 친구 따라 들어선 길이 지금껏 이어졌고, 앞으로 이어갈 평생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그녀. 더 재미있는 사실은, 함께 지원한 친구는 낙방하고 그녀만 특전사 부사관 후보생이 된 일이다.

후보생 시절은 고됐다. 함께 훈련 받은 동기들 중에는 ‘이럴 줄 몰랐다’며 도리질을 친 이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우연이 필연이 된 지점이었다.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접하는 새로운 훈련이 너무 재미있고 신기했어요. 고됐지만 제게 너무 잘 맞았다고 할까요.”

그렇게 후보생 과정을 마친 그녀는 특전사 여군중대에서 태권도와 특공무술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 동안 태권도는 공인 3단에서 5단이 됐고 그녀가 제작한 태권무가 전군에 보급되는 등 보람도 느꼈다.

여군 최초 천리행군 완주…“진통제 삼키며 400㎞”

그런 그녀에게 첫 시련은 2005년 9공수 특전여단으로 전입하면서 찾아왔다. 특전사가 2년에 한번 치르는 천리행군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지금껏 어느 여군도 천리행군을 해낸 이가 없었다.

“보직으로 봐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선 말리더군요.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 그냥 부대에 잔류한다고 해라, 네가 가봐야 다른 사람들만 불편하다… 처음엔 저도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나 싶었죠. 그런데 문득 오기가 생기더군요. 못할 건 또 뭐야 하는 오기가요.”

당시 대대장의 말도 김 상사의 용기를 북돋았다. ‘못해서가 아니라 안 해봐서’ 힘든 거라는 대대장의 말에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100명 중에 99명이 부정적으로 말해도 나를 믿고 할 수 있을 거라 격려해주는 한명의 지휘관이 있으니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한 달 기간의 훈련 중에 일주일만 참여해보라고 했는데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속으로는 내 반드시 모든 훈련을 완수하리라 다짐했죠.”

내륙전술훈련이라 불리는 특전사의 훈련 강도는 보통을 넘어섰다. 각급 부대와의 전술훈련과 산악 등반이 3주 내내 이어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주에 치러야 하는 것이 악명 높은 천리행군이었다. 일주일간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야장천 행군을 이어가는, 400㎞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천리행군 첫날, 자꾸만 뒤처지는 김 상사를 보고 지휘관은 그냥 차를 타고 따라오라 했다. 또 오기가 났다. 군장만 벗고 끝까지 걷겠노라 했더니 그럴 바에 그냥 포기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 상사는 지휘관을 붙잡고 사정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의 의지를 높이 산 지휘관의 허락이 떨어졌다. 군장을 벗어던진 그녀는, 남자 군인들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느라 이를 악물고 뛰다시피 행군을 이어갔다.

“피멍이 들어 발톱이 까매지고 뒤꿈치는 죄다 벗겨져 피범벅이 됐습니다. 매일 진통제를 삼키면서 행군을 했죠.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앞으로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결국 그녀는 천리행군을 완주했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복귀한 날, 축하의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가만 생각해보니 한 달 내내 걸은 거리가 580㎞쯤 되더군요. 참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털어냈습니다. 나도 특전사의 일원인데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천리행군을 계기로 무슨 일이든 못할 일이 없다는 자신감을 얻은 건 사실입니다. 이게 가장 큰 도전의 성과였죠.”

전쟁의 위험 속 한국군 자부심 느낀 해외파병

이듬해에는 그녀의 또 다른 도전이 이어졌다. 지금이야 루트가 다양해졌지만 2006년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해외 파병근무에 지원하게 된 것이다. “여군이 진급을 하려면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경력에 도움이 될 만한 객관적인 무엇이 필요했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파병이었습니다. 타향만리 위험한 지역에서의 삶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도전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여겼습니다.”

그렇게 김 상사는 이라크 파병길에 올랐다. 자이툰 사단 정문에서 현지 여성들의 검문검색을 담당했고 태권도 교관으로 현지인들에게 대한민국의 국기를 알렸다. 처음에는 경력에 도움이 될까싶어 자원한 파병이었다. 하지만 김 상사는 그곳에서 대한민국 국군으로서의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전쟁 통에 고통 받는 현지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다독이면서 눈물도 참 많이 흘렸습니다.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오히려 감사하게 됐죠. 왼쪽 어깨에 수놓인 태극기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느껴진 적이 또 없었습니다.”

6개월의 이라크 파병에서 돌아온 그녀는 또 한 번의 파병 길에 오른다. 이번에는 레바논이었다. “두 번째 파병이라 두려움은 덜했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막연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조선 잘 해야겠다하는 생각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죠.”

선발대로부터 폭탄테러 위험이 많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베이루트 공항에 내리자마자 방탄복과 소총이 지급됐다. 전쟁을 실감케 하는 현지 상황이었다. 하지만 못할 일은 없다는 도전정신은 이미 김 상사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김 상사와 한국군은 4개 마을을 책임지역으로 맡아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편히 쉬며 지내던 곳을 떠나 타지에서 내 재능을 나누고 힘을 보태는 일은 진정 가치 있는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전을 통해 참 행복을 얻은 경우라고 해야겠지요.”

끝나지 않은 도전 “여군 최초 주임원사 기대하세요”

김 상사는 작년에 근속 20주년을 맞았다. 부대에서 조촐한 행사가 있었고 그녀에게는 무척 뜻 깊은 자리였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도전하고 그것을 이뤄내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 세월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도전과 성취에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일단은 근속 30년 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더 나아가, 허락하는 한 특전사 부사관의 삶을 끝까지 이어가는 것이 지금 그녀에게 주어진 새로운 목표다. “원사로 진급해 여군 부사관 최초의 주임원사가 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지금 여군 중에는 아마도 원사 진급 대상이 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꼭 첫 사례를 만들고 싶습니다. 사실 원사 진급은 6년째 떨어지고 있지만요.(웃음)”

전역 후에는 아들과 함께 작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태권도 공인 5단의 실력파 엄마의 영향인지, 내년에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아들은 태권도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했다. “전역할 때쯤이면 아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태권도와 관련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아들과 함께 체육관을 운영하고 싶어요. 제가 가진 재능을 나누는 일은 전역 후에도 이어가려합니다. 제게는 또 다른 도전이 되겠죠?”

마지막 질문을 던져봤다. 김정아 상사에게 도전이란? “어떤 목표가 있어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도전 아닐까요? 물론 그 목표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일에는 하고 싶은 것 보다는 하기 싫은 일이 더 많기 마련이죠. 하지만 좋던 싫던 최선을 다해 이뤄내고 나면 성취감을 얻게 되고 또 다른 도전에 뛰어들 용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떤 난관에 부닥쳐도 삶 자체가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자신감을 갖고 임하면 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행복플러스 이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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