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5.1 노동절, 박노해 ‘노동의 새벽’은 과연 올까?

[아시아엔=김창수 시인] 박노해가 <노동의 새벽>을 펴낼 당시 박노해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서, 엄혹한 시대를 뚫고 가는 투사였다.

일찍이 해월 최시형 선생은 “하늘이 쉬는 것을 보았는가? 하늘 일하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였다. 삼라만상, 살아 있는 것들 모두가 일을 한다. 바람과 구름, 강과 바다도 일을 한다. 노동은 존재의 생존 방식이며 존재의 이유와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계에는 일하고자 하나 일 자리가 없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설령 일자리가 있어도 시간제 일 자리, 일용직, 비정규직 등 노동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인공지능과 로봇이 결합되면서 상시적 일자리는 더욱 희귀해질 수밖에 없다.

성서에는 “일 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쓰여 있지만 일자리가 있어야 그 말도 성립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신자유주의 하의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는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이윤극대화의 지름길이다, 라고 믿고 있다. 그 결과 노동의 유연성, 즉 정리해고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노동자들을 자본의 편익에 따라 마음 놓고 자를 수 있게 되었다.

박노해가 <노동의 새벽>을 쓸 당시인 1980년대 만해도 노동의 문제는 ‘정규직 일자리’ 부족의 문제가 주된 것은 아니었다. 노동조건과 노동상황의 열악함, 노동자의 인권 보장 등이 문제였지 비정규직이나 고용의 불안정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 박노해는 잔업, 특근, 야근 등에 몸이 망가져가면서, 노동이 끝난 새벽 빈속에 소주를 들이 붓는 노동자들의 참혹한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라도 내보일 수 있었던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오늘 ‘세계 노동자의 날’, 5월 1일의 현실은 그러한 꿈조차 꾸기 어려운 노동의 암흑시대로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

“노동자 만세! 노동해방 만세!”

이런 구호가 허망하지 않은 세상을 보고 싶다.

 

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 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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