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51] ‘범죄자’와 ‘예술가’의 차이는?

범죄자는 자기 지문을 말소하려고 고민하는 자요, 예술가는 자기 지문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자다.?-이어령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원규는 대학선배 장순섭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독립하기 전에 잠시 장 사장의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그 후에도 장 사장과는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왔지만 이문식과는 대학 동기이기 때문인지, 그는 어느 쪽 입장도 거들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었다.

“윤 사장, 잘 지내고 있지? 다름 아니라, 이문식 사장이 추석을 한국에서 지낼 예정이라며 부산에 와 있네. 그런데 자네하고 얽힌 문제를 풀고 싶다며 나한테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는데, 괜찮은가?”

“네, 선배님. 괜찮습니다.”

협의가 끝나고 나면 저녁을 다 함께 하기로 하여 원규가 예정보다 5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영도대교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커피숍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이문식, 심종하 그리고 장순섭 사장이 벌써 와 있었다. 세 사람 모두 A대학 동기들이고 원규의 선배들이다. 이문식과 장순섭이 얘기를 나누는데, 곁에서 심종하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원규가 자리를 잡자 서로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이문식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나와 심 사장은 고승대하고 같은 편이 아니니 그 점 오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네. 우리는 그냥 중립이야.”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일부러 말을 느물거리면서 여유를 부렸지만, 그가 쓸데없이 거짓말부터 늘어놓자 원규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문식의 눈빛은 츱츱할 뿐만 아니라 비열하고 불길해 보였다. 한때 원규는 고향 선배이자 대학 선배인 이문식에게 호의를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속에 의뭉수를 가지고 있는 소도둑놈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분을 인수하겠다고 하니 고맙네…… 자, 그럼, 내 지분과 심 사장의 지분을 모두 자네가 인수하되 인수가격은…… 이것이 중요한데…… 현재 동종업계의 우리 회사 규모를 감안하면…… 대충 3억원 정도로 추산하여 정하세.”

원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약간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 심 선배의 지분은 고승대와의 소송이 걸려있기 때문에 별도로 진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사가 계속 적자상태여서 부채가 많을 것이라고 들었지만 이 선배님과 승대의 더미들이 회계실사를 계속 방해하고 있어서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추산하여 정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회계실사를 한 후에 지분가치를 평가하여 인수하겠습니다.”

“이 사람아. 무슨 일을 그렇게 불편하게 진행하려고 해. 실사하려면 회계사 고용해야 하고 시일도 많이 걸리고……”

“회계사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내가 얘기하는 대로 대충 추산하여 매듭짓도록 하세.”

“그래, 윤 사장. 이 사장 말대로 하여 빨리 끝내세. 그리고 내 지분도 자네가 사서 나도 좀 빼 줘.”

심종하가 옆에서 이문식을 거들었지만 원규는 허튼수작을 걸고 있는 그들에게 염증이 났다. 비열한 사기꾼들. 이런 인간들이 사회에서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비열한 사기꾼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중고차를 팔면서 그 차의 상태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이잖아요! 3년 전에 회사의 주식을 인수할 때에도 이 선배님 멋대로 작성한 엉터리 재무제표에 속아 터무니없는 고가에 인수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또 실사하지 않고 지분을 인수하라고요? 실사를 하지 않는 한 지분 인수는 없습니다!”

“어허, 이 사람……”

이문식이 웃는 얼굴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가 아까보다 흐릿해졌고 눈빛도 흔들렸다. 그의 눈 속에서 먹고 튀려는 더러운 벌레가 득실득실 기어 다니는 것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네 사람 주위에 어색하고 막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자, 그럼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대화해봐야 소용이 없겠어. 종하야, 그만 가자!” 하고 이문식이 살며시 심종하의 팔을 잡고 일어섰다. 요령부득인 머리에서 아무런 분별이 서지 않는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우거지상이 된 얼굴로 이문식의 뒤를 비실비실 따라갔다. 원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겪었기 때문에 아무리 이문식이 그를 속이려 해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전에 그가 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사는 인간들에 대해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그런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장 사장이 맥이 빠진 듯 후- 하고 한숨을 쉬면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해거름 무렵의 부산항은 부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부유스름한 구름 아래로 새들이 나불거렸고 옅은 해무가 바다 위를 침울하게 흐르고 있었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의 가랑이처럼 살짝 벌어진 창문 사이로 갈매기들의 울부짖는 까슬까슬한 소리가 비린내를 묻혀왔다.

2012년 12월 초, 한국에서는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OSC 사무실에 마리셀과 마리오가 법원집행관과 함께 나타났다. 1년 전에 고소했던 회계자료열람청구소송을 필리핀 법원에서 받아들여 영장을 강제집행하기 위해서였다. OSC의 사장 헬렌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사무실 구석으로 가서 대부代父에게 전화를 했다.

“파블로! 지금 어디 계세요? 마리셀이 쉐립Sheriff·法院執行官을 데리고 사무실에 와서 서류를 뒤지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 말에 마닐라 시내에 있는 인트라무로스 골프장에서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있던 파블로가 펄쩍 뛰었다.

“뭐라고? 알았어! 지금 사무실로 갈 테니 그 작자들한테 회계자료 넘겨주지 말고 버티고 있어!”

“자료를 보관하고 있던 문을 아침에 일이 있어서 잠시 열어놓았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영장을 가지고 들이닥쳤어요. 쉐립은 영장집행을 방해하면 즉시 체포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어요. 빨리 와 주세요!”

“알았어!”

황급히 골프를 중단하고 라커룸으로 서둘러 가면서 이문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음만 반복되었다. 그 시각에 이문식은 OSC 사무실에서 있던 심종하와 심각한 어조로 통화 중이었다. 그는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잠시 뒤 사무실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본 더미 파블로는 아연실색하여 갑자기 몸이 딱 굳었다. 쉐립의 보호와 감독아래 마리셀과 마리오가 회계자료를 부지런히 복사하고 있었고, 쉐립 뒤에는 헬렌이 공포에 질려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꼭 다문 채 파리하게 서 있었다. 그녀 곁에 있는 심종하도 전전긍긍戰戰兢兢 여리박빙如履薄氷의 겁먹은 모습이었다.

군자가 악인을 응징하고 복수하는 데는 10년이라는 세월도 늦지 않으리. (君子報讐十年不晩) – 드라마 <랑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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