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46] “부처님은 모든 진실을 아실거야”

[아시아엔=문종구 <아시아엔> 필리핀 특파원, <필리핀바로알기> <자유로운 새> 저자] 무죄 판결에 크게 고무된 승대의 가슴 속에 독기가 차오르더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원규의 이미지에 커다란 흠집을 내고 그의 사업도 망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A대학동문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사실 하나에 거짓 열 개를 섞어 놓으면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짓도 사실인양 믿는다. 그래서 그는 법원 판결문을 제일 먼저 소개하여 말뚝을 세운 후 허위 사실들을 말뚝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의 눈빛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동문 제위

윤원규가 동원한 무장경비에 의한 공갈과 폭력으로 회사를 뺏기고 귀국했던 고승대입니다. 아마 이 메일이 그놈에게 알려지면 또 형사고소를 할 것은 분명합니다. 혹여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윤원규이라는 또라이에 의해 동문회와 관계된 분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되어 처음으로 보내드립니다.

윤원규는 필리핀에서 무장경비를 동원하여 저를 회사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는 돈에 미쳐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적자상태인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켜 놓은 시점에 저를 쫓아낸 것입니다. 윤원규는 필리핀에 숨겨 놓은 젊은 첩이 있고, 그의 친구인 박인채의 부인 고모부인 필리핀 경찰총경을 이용, OSC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여 달라 살인교사를 한 인간입니다.

제가 이런 메일을 드리는 이유는, 그래야 부산에 계신 동문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사기꾼 윤원규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앞으로 동문들이 범죄자의 집에 멋모르고 방문하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장을 작성한 후 다시 읽어 본 승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천재의 문장다웠다. 이 정도면 동문들과 지역사회에 원규를 파렴치한 사기꾼, 공갈 협박범, 살인교사범, 축첩을 하는 더러운 놈으로 각인시킬 것이다. 진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하더라도 강력한 흠집을 내고 나면 그 상처가 평생 아물지 않을 수 있다. 추한 것일수록 오래도록 뚜렷하고 분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 다음에 승대는 이 메일을 누구에게 보낼 것인지 고민했다. 만약 원규와 친한 동문에게 보냈다가 그가 냉큼 반론을 제기하거나 승대를 비난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박만길 회장과 정선일 고문. 이 두 사람은 원규와 사업상 어느 정도 경쟁관계에 있고,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으니 1순위로 받는 사람 리스트에 올렸다.

다음으로 황이헌과 안시중을 포함한 선배들 네 명. 권위주의에 절어 있어서 동문 모임 때마다 장유유서를 따지는 그들은 평소에 기수旗手를 무시하는 원규를 싫어했다. 그래서 이제 여섯 명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후배들 중에 돈 욕심이 많아 보이는 네 명을 골랐다. 돈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미 사업에 성공한 동문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과 행동을 극히 조심한다. 그리고 승대가 이미 고른 여섯 명의 선배들은 후배들보다 부자들이고 지역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이름과 나란히 받는 사람 리스트에 한통속으로 묶어주면 오히려 고마워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벌써 열 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원규의 동기생 이권호 사장을 골랐다. 권호는 원규와 절친한 사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적을 만들지 않는 성격의 권호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이메일을 받아도 승대를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처세가 항상 올바르고 착하다고 소문난 권호를 리스트에 포함시켜야 승대가 보내는 이메일의 신뢰성을 높여줄 것이라는, 아이큐 천재만이 할 수 있는 계산도 저변에 깔아 두었다.

그래서 승대는 열한 명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 후 몇 주일이 지나도 원규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음먹은 대로 올가미를 씌운 것 같아 승대는 흐뭇했다. 오랜만에 가슴속 체증이 확 뚫리는 듯 했다.

승대가 동문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이메일을 열한 명만 보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몇 명이 ‘이거 재미있는 얘기네!’ 하면서 다른 동문들에게 뿌렸고, 후배 두 명이 원규에게 메일 내용을 알려주었다.

“윤 선배님! 저는 그 이메일을 보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메일의 수신인들은 동문 전체도 아니고 평소 고 선배하고 성향이 비슷하거나 윤 선배님을 싫어하는 사람들만 골랐으니 거짓소문을 퍼뜨리려는 나쁜 의도인 것으로 느껴져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고맙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만일 그 내용이 거짓이라면 당연히 선배님께서 해명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벌써 많은 동문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며 선배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말하고 다닙니다.”

“……”

그날 밤, 원규는 부산남부동문들 전체가 받는 이메일로 승대의 거짓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증거들도 첨부해서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동기생인 이권호에게 전화를 했다.

“권호, 잘 지내지? 다름이 아니라, 한 달 전에 고승대가 너를 포함한 동문들 열한 명에게 내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허위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더라. 그런데 너는 그동안 나한테 아무런 얘기도 안 해주었고, 나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어. 혹시 그 메일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냐?”

“원규야, 내가 승대의 메일을 받고도 너한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남의 말썽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동기로서 비난을 하거나 실망했다면 그 부분은 달게 받겠다.”

원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권호가 그를 동기라고 했다. 그와 승대를 싸잡아 남이라고 했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나? 원규 혼자서 권호를 친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담에 물이 아니면 건너지 말고 인정이 아니면 사귀지 말라고 했다. 그는 권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자네의 설명 잘 들었네. 자네는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하지. 그것은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라고 하더군. 나에 대한 헛소문이 퍼지더라도 앞으로 다시는 자네 의견 묻지 않을 것이고 자네가 나서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네. 아, 이 말은 사실 이제까지는 자네한테 다소나마 기대한 면이 있었다는 얘기네. 친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나의 잘못이라는 것이지. 우리는 그냥 대학동기일 뿐이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뼛속에 사무치도록 느꼈네.

하지만 대학동기들 카톡 방에서 누군가가 올린 적이 있었던 두 개의 문장은 적었다가 지웠다. 그런 말은 친구들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가짜 친구는 루머를 믿지만, 진짜 친구는 너를 믿는다.

* 당신의 친구에게 힘든 일이 전혀 없거나 친구의 역경을 모른 체한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는 것이다.

원규가 해명 이메일을 보낸 이틀 후, 정선일 고문이 동문 전체 이메일로 회신을 했다. 그는 원규보다 십년 이상 선배이고 전임 동문회 회장이다.

윤 사장,

개인적인 분쟁의 메일은 당사자들 간에 교신하기 바랍니다.

얼마 전 고 후배도 비슷한 메일을 전체에게 보내왔던데, 그 누구도 회신이나 대응을 안 하고 무시하였습니다. 두세 사람간의 분쟁을 우리 대학 동문회로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철저히 개인적인 일임을 상기시킵니다.

개인 간의 사업상의 분쟁인 것을 부산남부동문회 전체 메일로 보내는 것은 예의에 안 맞는다고 봅니다. 혹시나 부산남부동문회가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고 후배나 윤 사장이나 앞으로 전체 메일로 이러한 개인분쟁을 보내는 것을 삼가 해주기 바랍니다. A대학교 부산남부동문회 고문 정선일 드림.

우주에는 수많은 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둠이 깊지 않으면 그 별들의 밝기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 원규의 주위에는 많은 동문들이 있어서 평소에는 서로 친한 척 하지만 원규에게 곤경이 닥치기 않으면 그들 중에서 과연 누가 가까이에서 빛을 내는 친구인지 알 수가 없다. 곤경은 주위 사람들 중에 누가 친구인지 누가 친구인 척 하는지, 혹은 누가 적인지 구분하게 해 주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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