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여왕···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왼쪽) 진성여왕 (887-897), 서태후(1830-1908)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우리나라 역사에 보면 유독 신라에만 여왕 세분이 존재했다. 그 기간은 30여년에 불과했다. 주인공은 선덕여왕(善德 재위632~647), 진덕여왕(眞德 재위 647~654), 진성여왕(眞聖 재위887~897).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후 곧바로 이어진 검찰 조사에 이어 27일 검찰에서는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과오가 막중했다 하더라도 막상 구속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니 짠한 게 마음이 편치 않다. 문득 신라의 여왕들 모습이 떠올랐다.

신라의 여왕들도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비운의 여왕으로 막을 내렸을까?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였지만 유독 신라의 여왕들이 능력을 발휘를 하였던 것을 보면 아마 지금처럼 여성상위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세 여왕을 살펴보자.

첫째, 선덕여왕은 왕위를 안정적으로 물려받았다. 자신이 운용을 할 수 있는 세력에 대하여 잘 파악하고 그 세력들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또한 국가안위를 강화하는데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겨내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진덕여왕은 삼국통일에 대비해 신라조정의 국론을 통합했다. 그리고 외부의 힘을 이용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이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무열왕 김춘추와 선덕여왕의 사이에서 자리만 보전한 인물로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재위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고 인재를 기르고 통일에 잘 대비하였다는 평가다.

셋째, 진성여왕은 망해가는 나라를 이끌었다. 자신의 능력부족과 함께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라의 멸망에 대비를 못하였던 인물이다. 신라의 제51대 왕으로, 신라시대 3명의 여왕 중 마지막 왕이다. 가장 젊은 나이에 즉위한 여왕으로 즉위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어 민심 수습에 힘썼으나, 조세의 격감으로 재정이 고갈되자 세금을 독촉하면서 민심이 이반하기 시작했다.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다. 제48대 경문왕(861~875)은 화랑 출신으로 왕위에 올라 15년간 재위했다. 경문왕은 860년 9월 헌안왕의 장녀와 결혼하여 왕자 정(晸)과 황(晃), 그리고 공주 만(曼)을 낳았는데, 이들은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여 49대 헌강왕(875~886), 50대 정강왕(886~887), 51대 진성여왕(887~897)이 되었다.

헌강왕은 12년간 재위했지만 정강왕은 1년 만에 죽었고, 이에 여왕이 등장했으니 곧 진성여왕이다.

이처럼 경문왕의 삼남매가 차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으로 경문왕의 친동생 위홍(魏弘)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경문왕 때부터 상재상(上宰相) 병부령(兵部令)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왕을 보좌했고, 헌강왕이 즉위하자 다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는 마음대로 국정을 처리했다.

그래도 20대 초반의 진성여왕 즉위는, 그것도 경문왕의 두 아들과 딸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헌강왕과 정강왕, 그리고 진성여왕으로 이어진 삼대(三代)의 즉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한 노력의 하나가 <삼대목>(三代目) 편찬이다.

진성여왕은 즉위 2년에 위홍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모아서 편찬하게 하였는데, 그 책이 <삼대목>이다. 대구화상은 향가에 밝은 고승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은 평소에 각간 위홍과 더불어 정을 통해 왔는데, 즉위 2년부터는 늘 궁궐에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王歷)에는 위홍대각간이 여왕의 남편이라고 했다. 위홍은 실제로는 진성여왕의 숙부였다. 그리고 종실의 대신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었다.

진성여왕 2년(888)에 각간 위홍이 죽었다. 진성여왕은 위홍이 죽은 후에는 몰래 젊은 미남자 두세 명을 끌어들여 음탕하고 난잡하게 굴고는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사랑을 받는 자들이 뜻을 펴게 되어 뇌물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벌은 공평하지 못해 기강이 허물어졌다.

정치가 문란해지자 도적(盜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여러 고을에서는 공물을 바치지 않아 국가 재정은 어려워졌다. 진성여왕 3년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5년 양길은 부하 궁예(弓裔)를 보내 신라 군현(郡縣)을 공격했다. 6년 후백제 견훤(甄萱)은 완산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무진주를 쳐서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다.

진성여왕 8년 궁예는 명주로 옮겨 스스로 장군이라고 했으며, 이듬해에는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다. 10년 서라벌 서남부에서는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무리가 나타나 적고적(赤袴賊)이라고 하면서 경주 모량리까지 출몰해서 민가의 재물을 빼앗아 갔다. 이렇게 신라 사회는 혼란했고, 그 결과 후삼국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당시 신라는 “사람 죽이기를 삼 베듯하여 던져진 백골이 숲처럼 쌓였다” “군읍(郡邑)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고 산천이 모두 전장이 되어버렸다”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처럼 모든 환란이 한꺼번에 밀어닥쳐 병든 나라를 더 이상 다스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성여왕은 양위(讓位)를 결심했다.

진성여왕은 만류하는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스스로 왕위를 조카에게 양위했다. 재위 10년 만이다. 그리고 사저(私邸)인 북궁(北宮)으로 돌아갔다. 몸에 병이 많았던 진성여왕은 양위한 지 6개월 만에 죽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비선실세가 득세를 하고 국정을 농단하며 국왕이 혼음(混淫)에 빠져있는데 나라가 온전할 리가 없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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