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다이아몬드급 ‘식모’

1960년대~1970년대 우리나라에는 가정부가 존재하였다. 이들은 ‘식모(食母)’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졌다. 한 때 귀에 익숙했던 식모라는 이름이 지금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당시 사회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처량하였다. 집집마다 형제자매들은 많고 먹을 것은 귀했다. 5남매, 6남매 이상은 기본이었다.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남의 집이나 먼 친척 집에서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우리의 가난한 집 딸들은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 어린애 봐주고 온갖 설움을 참아가며 숙식을 해결하였다. 돌이켜보면, 필자의 가정형편도 그다지 유복한 편이 아니었지만, 등짝이 ‘백금녀’만한 식모 등에 업혀 지냈던 시절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당시의 식모들은 대가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요즘의 파출부처럼 일당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공짜 밥’을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였다.

1970년대 들어 이들은 자존심 상하는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도시로 향하였다. 버스안내양이 되거나 공장에 들어갔다. 식모보다는 차라리 ‘공순이’를 택한 것이었다. 이후 식모는 가정부라는 비교적 고상한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비교적 형편이 나은 집에서 이들을 고용하였다. 당연히 고정적인 월급도 받았다.

한때 필리핀의 고급인력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정부로 일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쳐 주었다. 그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닐 수 없다. ‘공순이’의 등장과 함께 ‘식모문화’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이웃?중국에서는 가정부나 파출부를 보모(保姆)라고 부른다. 남편을 따라 중국에 진출한 한국 아주머니들 중 십중팔구는 보모를 두고 생활의 여유를 즐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적은 돈으로 보모를 고용하는 호사를 누린다. 인구가 많다 보니 보모 구하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시간당, 일당, 월급제 등 형태도 다양하다.

경제대국의 반열에 들어선 중국의 보통 가정에서도 보모의 손길이 날이 갈수록 많이 필요한 모양이다. 대학을 나오고도 안정적 직업을 찾지 못해 가끔 보모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심지어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는 대학을 마친 남성들도 간혹 ‘보모 전선’에 뛰어든다.

중국에서는 보모도 등급을 매겨 단가를 정한다. ‘보모 인력시장’의 등급별 임금실태가 간간이 화제에 오른다. 이들은 시간당 10위안(한화 약 1800원), 15위안 수준이다. 우리나라 최저 임금의 3분의 1 수준을 상회한다. 보모 개인이 가진 잠재력과 경험, 능력에 따라 받는 임금도 천차만별이다. 농촌에서 갓 올라온 초보 수준 부녀자의 경우, 초임이 1500위안 정도다. 돌봐야 할 노인들이나 아이들이 있는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2400위안 정도 받는다고 한다.

인력이 넘쳐나다 보니 파트타임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다. 주 5일 근무에 매일 두 시간씩 일하면 한 달에 500위안이고, 주 6일 근무하면 600위안을 받는다. 작년에 비해 100위안 올랐다고 한다. 근무 여건이 열악한 중국 경비원들의 한 달 평균 임금은 1300위안 정도이다.

직업소개소 ‘하오쑤싸오(好蘇嫂)’ 관계자에 의하면 스타급 보모의 임금은 화이트 칼라의 그것과 맞먹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경험이 6~7년 정도 되고 일정한 기능을 갖춘 ‘다이아몬드급(?石星?)’은 5000위안, 골드급(金星?)은 4000위안, 실버급(?星?)은 3000위안 정도이다. 마치 우리나라 다단계 판매조직책들의 직급 같다. 나라가 크다 보니 가정부도 등급을 매기는 별난 나라다.

보모 문제를 몇 자 적어나가는 가운데 갑자기 까닭 모를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구한 말 20대 중반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조선의 아리따운 딸들을 첩으로 거느리면서 조선의 국정을 농단하였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또 다시 대한의 딸들이 오만한 ‘중화제국’의 보모로, 첩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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