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과실은 누가 따먹나?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1917년. 혁명이다! 러시아 공산당혁명이다. 혁명, 충격이었다. 일본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마르크스주의 완전 신봉.

이 시대 인텔리겐치아,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식인들 자문자답, 묻고 답도 제시했다. 그 길 알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

도쿄 간다(神田) 서점가 책방마다 마르크스주의 코너 설치됐다. <공산당선언>, <자본론> 없으면 장사 안 됐다. 그날 입고한 공산주의 책이 떨어지면 한나절에도 폐점했다. 다른 책 구하는 객이 없었다.

경제학과 재정학 교수는 자본론 세례 받은 학자였다. 마르크스주의를 경제학 연구방법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좌경교수가 하도 많아 누군 내보내고 누군 놔두고 하는 식의 선별이 쉽지 않았다. 모두 추방했다.

1918년 12월. 학생들도 빠지랴. 도쿄제국대학 신인회(新人會)가 결성됐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흠모하는 학생들이 뭉쳤다.

1926년 봄. 1894년 생 후쿠모토 카즈오(福本和夫)가 도쿄 기쿠도미(菊富) 호텔 방을 얻어 개인사무실을 개설했다. 여기는 곧 맑시즘 살롱이 됐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후 정부장학금으로 독일 유학을 갔다 왔다.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자본론을 공부해 독일공산당(the German Communist Party)에도 가입했다.

서른두 살 신예학자인 후쿠모토는 잡지 <Marxism>을 통해 유학 다녀오지 않은 국내파 마르쿠스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했다. 쟁쟁한 학자들이 그의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당연히 살롱으로 지식인들이 몰려들었다. 인기작가도 거기 있었다. 잘 나가는 영화배우들도 얼굴 내밀었다. 도쿄여자대학 학생들은 아예 차 대접이며 청소며 잔심부름 도맡았다.

자천타천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들락거렸다. 무슨 사상인지 잘은 모른다. 그렇지만 인텔리겐치아 사이에 난리다. 방명록에 이름 올려야 축에 낀다. 이렇게 그런저런 남녀들이 기쿠도미호텔 그 방으로 쇄도했다.

인텔리가 전위가 되어 후위인 노동자와 농민을 지도한다 했다. 무료한 지식인에게 이 전위 역할을 부여했다. 할 일 준 그에게 몰렸다.

여기서도 코뮤니즘(communism) 저기서도 볼셰비즘(Bolshevism)이 일본 지식인사회를 장악했다. 당국은 사회불안 요인이라 하여 더욱 바짝 죄어 나갔다. 그래도 시대의 패션으로 등극했다.

그제나 지금이나 아이러니다. 성공한 노동자나 농민 출신 Marxist는 드물다. 빈곤의 주체인 사회와 역사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에서는 늘 배제되고 언제나 소외됐다.

대학 다녔고 유학 가고···. 이 정도면 프롤레타리아 아니다. 잡종 아닌 순종 부르주아다. 혁명의 과실은 이들이 다 따먹는다. 권력의 주인공 된다. 호의호식한다. 냉난방 된 곳에서 편하게 산다. 혁명의 모순이자 운동의 배반이다.

그래도 여전히 혁명 꿈꾸는 이의 마음을 지배한 ‘무산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사회 전복과 사회주의 도래’라는 역사발전법칙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 정치의 향배에 따라 번식·확산하는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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