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실화소설 ‘더미’ 24 ] 11월부터 이듬해 5월은 건기철

source - ND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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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 바로알기> 저자] 이문식의 제안에 인채가 동의했다. 그래서 승대의 임금과 비용에 대한 부분은 추후 협의하기로 하고 <투자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극히 유감스럽게도 이 사항에 대해 투자자들은 그 후 협의를 하지 않았다. 물론 승대가 계속 회사가 적자라고 보고했고, 흑자가 아닌 상태에서는 스스로 급여와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호언했으니 그러려니 하고 원규와 인채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이것을 핑계 삼아 허튼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 생길 줄 원규와 인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2월 17일, 매연과 뒤섞인 무더운 공기가 마닐라 전체를 불쾌하게 뒤덮고 있었다. 필리핀은 11월부터 이듬해 5월 말까지 기나긴 건기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의 마닐라 공기는 매연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탁하고 역하다. 세 명의 동업자들이 OSC의 회의실에 다시 모였다. 승대가 회사의 실사보고를 하지 않아 인수금액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이 왜 이렇게 더워요? 에어컨이 고장인가요?”

인채가 이문식을 쳐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직원들 책상마다 선풍기가 한 대씩 돌아가고 있었다.

“아, 네. 우리 기술자가 손을 보고 있는데 사용한지 워낙 오래된 중고제품을 샀던 것이라……”

“제가 경영을 인계받으면 사무실 에어컨을 다 신제품으로 바꾸겠습니다. 직원들 책상도 다 바꾸고, 특히 사장실이 너무 초라해요. 이래 가지고서야 거래처와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해요.”

승대의 핀잔은 이문식보다 경영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우월감이 묻어있었다. 이문식은 속으로 픽 웃었지만 겉으로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회사에 여유 자금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때 여직원 헬렌이 할로할로(필리핀식 팥빙수)를 사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세 사람은 당장에 어찌할 수 없는 더운 공기를 할로할로와 뒤섞은 후 목구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몸의 체온만이라도 살짝 낮추었다. 인채가 얼음 가루를 입에 넣으며 승대에게 물었다.

“고 차장. 도대체 회계실사 보고는 언제 하려는가?”

“형님, 제가 하기 싫어서 실사를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달 말까지는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본사의 지시가 있어서 지금 살고 있는 집 정리해야지요, 애들 학교 전학시켜야지요, 업무 인수인계해야지요, 제가 지금 너무 바쁩니다만 실사는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문식이 서류 두 장을 꺼냈다.

“고 차장이 바빠서 실사를 끝내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 이 재무제표를 근거로 인수금액을 확정하면 어떨까요? 내가 경리 직원들과 함께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정리했습니다.”

이문식을 쳐다보고 있던 인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이미 약속했던 대로 고 차장의 실사 결과가 나온 뒤에 인수 금액을 확정짓는 것이 순리입니다. 이것은 이 사장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순리대로 해야만 나중에 뒷말이 없게 됩니다.”

그러자 승대는 이문식과 인채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도 저희들끼리 의견차이가 많이 나는 듯싶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시간에 끌려 다니고 싶지 않으므로 오늘 모임 때 결론이 나든지 안 나든지 12월 말 계약서에 서명하겠습니다. 제가 돈이 없어서 또는 당장 매출을 늘릴 방법이 없어서 동업하자고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OSC 정도의 흑자를 내는 회사면 더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저 혼자서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업을 하면 차후에 더욱 큰 비젼을 실현할 수 있어서라고 믿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장님의 회계자료를 기준으로 OSC의 인수금액을 확정하자는 말인가?”

승대는 인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바위 같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그렇습니다!”

2009년 1월, 부산 본사에 복귀하자마자 승대는 사표를 제출했고, 마닐라에서의 동업사업도 그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이문식이 2008년 말 기준으로 재무제표를 동업자들에게 보내면서 프리미엄 40%를 인수대금에 얹었다. 프리미엄을 포함한 이유를 OSC가 단골고객이 많아서라고 이문식이 설명했다. 그것은 이문식과 승대가 은밀하게 이미 합의했던 것이었다.

승대는 원규와 인채에게 각자 20%의 지분에 해당하는 6천만 원씩 이문식의 계좌로 송금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문식과 승대를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즉시 송금했다.

승대가 이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선배님, 윤 사장과 박 사장의 투자금 입금확인 하셨습니까?”

“응. 조금 전에 확인했네. 수고했어!”

“저의 계약금은 이번 주 내로 송금하고 입금전표를 동업자들 전체 메일로 보낼게요. 하지만 잔금은 지난번에 선배님과 합의한 대로 하는 것이지요?”

“암, 그렇고말고! 우리 두 사람의 약속은 끝까지 지켜야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야, 사실 내가 요즘 자금사정이 어려운 차에 자네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숨통이 트이게 되었으니 내가 자네한테 감사해야지.”

“뭘요, 아하하하!”

승대는 전라도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지역의 수재들만 다녔다는 명문고 출신 선배로부터 ‘기발한 아이디어’의 소유자라는 인정을 받게 되자 우쭐했다. 역시 천재와 수재는 서로 통하는가 싶었다. 앞으로도 사업과 경영을 상의할 대상은 둔재 윤원규와 박인채가 아니라 수재 이문식이라는 것을 그의 아이큐는 직감했다.

승대가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것과 그 이유가 필리핀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부산 시내의 A대학 동문사회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거기에는 이미 성공한 사업가인 양 떠버리고 다닌 그의 가벼운 입술이 큰 역할을 했다.

소문을 듣고 걱정하는 원규의 지인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승대가 똑똑한 체하지만 실제로는 바보 녀석이라고 일러주었다. 능력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결코 믿을만한 인간이 못 된다고 넌지시 암시해준 사람도 있었다.

“윤 사장. 무능하고 재주 없는 소인배일수록, 더럽게 나대고 설치면서 격에도 맞지 않는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법이네.”

하지만 원규는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승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쁜 얘기하고 다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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