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폐막 2달 다시 돌아보니···내년엔 ‘정치 간섭’ 없이

밀정, 영화

[아시아엔=이즈미 지하루 서경대 국제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영화칼럼니스트/정지욱 영화평론가, 문화평론가] 1996년 가을, 남포동 극장가 거리에 돗자리와 신문지를 깔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영화 얘기로 밤을 새웠던 때가 있다. 낮엔 영화를 보고, 밤엔 술 마시며 영화를 얘기하고, 아침나절 잠시 눈을 붙여 쉬다가 다시 영화 보기를 반복하곤 했다. 대한민국에서 열린 첫번째 국제영화제를 나는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년이 지나 스물한 번째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결국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간 해운대 영화의 전당 일대에서 열린 ‘2016부산국제영화제’는 개막작 <춘몽>을 비롯해 69개국 299편이 초청 상영됐다. 지난해 75개국에서 302편이 초청 상영된 것에 비해 표면상 그다지 축소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개막 하루 전 몰아닥친 태풍 ‘차바’는 해운대 바닷가에 설치된 야외행사장을 망가뜨렸지만 행사장소를 영화의 전당으로 옮겨 별다른 탈 없이 진행됐다.

때맞춰 시행된 ‘김영란 법’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얘기 나누고, 즐기는 축제”로서의 영화제를 서로 눈치를 봐가며 냉랭하게 지내는 영화제 기간이었지만, ‘와이드앵글파티’를 비롯해 영화제를 대표하는 여러 파티들에선 영화인들이 모여 많은 의견을 나누고 친목을 다지는 자리가 됐다. 결국 부산국제영화제 자체에선 주변의 우려에 비해 그나마 만족할만한 영화제를 치러냈다는 것이 중평이다. 물론 지켜보는 입장에서 영화제 기간 내내 조마조마했었지만.

‘영화’로서 ‘영화제’를 평가받는 부산국제영화제

2014년 영화 <다이빙 벨> 초청 상영에 대해 서병수 부산시장이 간섭하며 촉발된 부산국제영화제 사태로 한국영화인들의 절반이 보이콧하는 상황에서 개최된 이번 영화제가 원활하게 개최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의 좋은 작품들이 상당수 초청되어 영화제의 내용을 튼실하게 지켜줬다. 결국 영화로서 평가 받는 영화제의 기본은 한 셈이다.

개막작 <춘몽>은 장률 감독의 작품으로 수색역 앞 서민 동네 ‘고향 주막’ 주인 예리(한예리 분)에게 푹 빠져 있는 동네 건달과 바보, 월급 떼인 탈북청년 등 세 남자와 얽힌 이야기를 꿈결처럼 담고 있다. 얼핏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훨씬 담백하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국동포 장률 감독의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정하고 <아가씨>(박찬욱), <그물>(김기덕), <내부자들>(우민호), <덕혜옹주>(허진호), <밀정>(김지운) 등이 참가해 한국영화의 체면을 세워줬다.

특히 신선함으로 다가온 한국의 젊은 감독들의 작품은 부산영화제의 활기를 불어 넣어주며 관객들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동은 감독의 <환절기>는 명필름영화학교의 두 번째 작품으로 ‘뉴커런츠 섹션’에 출품되어 관객상을 수상했다. 임대형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 대해 많은 관객들은 “아버지에 대한 헌사이자 기주봉 배우에 대한 헌사”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외에도 손태겸 감독의 <아기와 나>, 남연우 감독의 데뷔작 <분장>, 이성태 감독의 <두 남자>,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 이완민 감독의 <누에치던 방>, 이현하 감독의 <커피메이트>, 김의곤 감독의 <두 번째 겨울> 등이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눈여겨 볼 만한 한국의 신작들이었다.

한자리에 모여 함께 추억하다

동시대 거장들의 신작이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화제작을 선보이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는 이상일 감독의 <분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은판 위의 여인> 그리고 벤 영거 감독의 <블리드 포 디스>가 초청됐다. 이 중 일본 현지에서 이미 천만관객을 기록하며 올해 일본영화계 최고의 화제작이 된 <너의 이름은>은 일반관객은 물론 게스트 사이에서도 티켓 경쟁이 뜨거워 상영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사춘기의 풋풋함과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의 궤적, 롤러코스터를 타고 달리는 듯 펼쳐지는 스토리 전개는 관객들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특별했던 섹션은 콜롬비아 영화들 소개다. 현대 콜롬비아 영화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는 특별전을 선보여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콜롬비아 영화사’를 빛낸 6편의 단편과 8편의 장편이 등장했다. 이는 콜롬비아 본국을 제외하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최대 규모의 행사로 최근 10년간 칸, 베를린, 선댄스 등 주요 영화제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현대 중남미 영화를 이끄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는 뿌리와 오늘날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지난 7월, 타계한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추억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그를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으로 선정해 개막식에서 시상하는 것은 물론 포럼 개최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그의 마지막 작품 <사랑을 카피하다> 상영관에는 관객들이 줄을 이었고, 키아로스타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던 ‘키아로스타미의 길’과 그의 생애 가장 엄선된 순간들을 모은 다큐멘터리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한 76분 15초>는 그를 추억하는 거룩한 시간이었다.

 

영화제에서 만난 세계의 영화인들은 입을 모아 서병수 부산시장을 훈계했고, 부산국제영화제가 지켜지기를 기원했다. 일본의 배우 와타나베 켄은 공식 기자회견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억누르려고 하는 상황이 죽기보다 싫은 사람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에 큰 동정심 느낀다”며 영화제를 응원했다. 오다기리 조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응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고 기자간담회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