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7일] 킬링필드 주역 재판 만 3년째

2009년 ‘킬링필드 단죄’ 30년 만에 시작

2009년 2월17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킬링필드’의 주역들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집권 당시 캄보디아인 20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크메르루주 정권의 하수인들이 법정에 나타났고, 킬링필드 피해자인 반 나트와 마주섰다.

유엔과 캄보디아가 합동 구성한 ‘민주캄푸치아 시기의 범죄 소추를 위한 캄보디아 특별법원(the Trial Chamber of the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 ECCC)’에 선 첫 피의자는 크메르루주 정권 때 투올슬렝(S-21) 교도소 소장이었던 캉켁이우(당시 나이 67세). 투올슬렝 교도소에서 집단학살과 고문 등 반인도주의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자였다.

1만6000여명이 갇혀 있던 투올슬렝의 생존자는 10~20명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첫 재판이후 크메르루주 정권 2인자인 누온 체아(83)와 키우 삼판(78) 당시 대통령, 이엥 사리(84) 당시 외무장관, 그의 부인이자 사회부 장관을 지낸 이엥 티리트(77) 등이 줄줄이 법정에 섰다. 크메르루주 최고지도자 폴 포트는 11년 전인 1998년 심장마비로 이미 숨졌다.

캄보디아 정부와 유엔은 1990년대부터 ‘킬링필드’ 학살을 단죄할 특별법정에 대해 교섭을 진행했지만 정작 재판정 구성이 끝난 것은 2006년이었고, 게다가 3년 가까이 지나서야 첫 재판이 열렸다. 집권 훈 센 정권은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5630만 달러를 재판 비용으로 지원받았지만 모두 써버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에도 소극적이었다.?유엔 쪽 검사들은 지난해 6명을 추가 기소하자고 주장했으나 캄보디아 검사들이 “국민적 화해의 필요성”을 이유로 반대, 무산됐다. 재판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던 훈 센 총리는 젊은 시절 크메르루주의 초급장교로 활동했던 전력이 있었다.

특별법원은 크메르루주가 집권한 1975년 4월17일부터 그들이 몰락한 1979년 1월7일 전날까지 일어난 반인도적 범죄 및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는 고위층만을 단죄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당시 강제이주·강제노동·질병·기아·고문·처형 등으로 대략 170만명이 희생된 것에 대해 피고들은 최저 5년형, 최고 종신형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2012년 2월17일 만 3년째 아시아판 뉘른베르크 재판은 계속되고 있으며, 인터넷(cambodiatribunal.org)을 통해 지구촌 사람들에게 샅샅이 공개되고 있다.

2008년 코소보 세르비아로부터 독립 선언

2008년 2월17일 코소보는 국제적인 합의 없이 세르비아로부터의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총리인 하심 타치가 코소보 의회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가운데, 그는 코소보가 모든 민족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국가가 될 것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이에 코소보 의회는 독립 선언을 승인했다.

코소보 의회가 승인한 독립선언은 유엔의 계획에 따라 설정된 제한적 독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코소보나 그 일부는 다른 국가에 편입될 수 없으며 국제기구의 감독을 받아야하고, 코소보 군대의 운용도 제한적이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이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세르비아와 러시아, 스페인은 반대했다. 그리스와 루마니아 등은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유럽 연합은 2000명 규모의 경찰과 판사 등 공무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유엔(UN)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에서 러시아는 “코소보 독립선언은 법적 무효”라고 주장했다.

아직도 코소보의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충돌 가능성은 낮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하루 한번 꼴로 자살폭탄 테러

2008년 2월17일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자살폭탄 테러로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2008년은 ‘자살폭탄 테러의 해’로 불릴 수 있을 만큼 많은 테러가 있었다. 239건으로, 2011년 한국의 근무일수인 258일에 조금 못 미치는 엄청난 수치다. 휴일 빼고 거의 하루에 한 건씩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난 셈이다.

유엔아프간지원단(UNAMA)의 공식 통계로는 2005년 17건에 불과하던 아프가니스탄 자살폭탄 테러는 2006년 들어 8.24배 늘어난 140건으로 껑충 뛴다. 2007년 들어선 228건으로 급증한다. 미군과 한국 외교통상부의 통계는 이 보다 적은 수치다.

2001년 탈레반 정권 몰락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임시정부 출범, 카르자이 대통령 선출, 총선의 성공적 실시 등으로 전후 복구와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치안도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2006년 이후 자살폭탄테러와 외국인 납치 사건 등이 빈발해지고, 동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이 확산됐다. 자살폭탄 테러는 이후로도 계속 줄지 않고 계속됐고, 테러 한 건 당 10여 명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통계에 나타나고 있다.

‘순교’를 앞둔 자살폭탄 테러 전사들에게 딱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이념과 종교적 신념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투철한 국가관과 애민애족을 부르짖는 집권자들과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왜 한 명도 ‘순교’에 나서지 않는 지를 헤아려 보길 바란다. 그의 목숨도 하나, 당신의 목숨도 하나다. 더 귀하고 덜 귀한 목숨이란 없다.

2006년 필리핀 레이테 섬 산사태로 1800여명 사망

2006년 2월17일 오전 10시쯤 필리핀 남부 레이테 섬에서 엄청난 규모의 산사태가 발생해 무려 1800여명의 인명이 희생됐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필리핀 정부는 당시 공식 사망자 수를 1126명으로 집계했다.

이번 산사태는 무려 10일에 이르는 집중호우와 진도 리히터 지진계 기준 진도 2.6의 약한 지진이 만나면서 빚어졌다. 무너진 바위와 흙들은 세인트 버나드 타운의 귄소곤(Guinsaugon) 마을을 뒤덮었다. 사고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 초등학교가 완전히 매몰 된 것이 최악의 비극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서 수업 중이었기 때문이다.

1998년 대만 여객기 추락으로 203명 사망

1998년 1월17일 오후 승객과 승무원 196명을 태우고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타이베이(臺北)로 돌아오던 대만 국영 중화항공공사(CAL) 소속 에어버스 A300여객기 676편이 타이베이 서쪽 약 46㎞ 떨어진 중정(中正)국제공항(일명 장제스·蔣介石국제공항)에서 착륙을 시도하다 추락, 탑승자 전원과 추락지점에 있던 민간인 9명 등 250명이 사망했다.

승객 중 외국인은 미국인 인도네시아인 등 6명이었다. 여객기가 추락하면서 부근 가옥 10여 채를 덮쳐 지상에서도 2개월 된 아기를 포함한 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CAL여객기는 1994년에도 일본 나고야(名古屋) 공항에 추락, 탑승자 271명 전원이 사망했다.

2002년 5월25일 중화항공(CAL) 여객기가 대만섬 서쪽 50㎞펑후현(澎湖縣) 마궁(馬公) 근해에서 추락, 탑승객 225명 전원이 숨졌다.

2000년 10월31일 오후에도 승객과 승무원 179명이 탑승한 싱가포르 항공 소속 보잉 747 여객기가 악천우 속에서 대만(臺灣) 타이베이(臺北)공항을 이륙하던 중 추락, 8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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