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중섭①] 내달초 덕수궁 전시 마치는 이중섭 소떼 몰고 ‘부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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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백의 ‘길 떠나는 가족’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올해는 이중섭 화백 탄생 100주년, 작고 60년 되는 해다. 이중섭은 1956년 9월 6일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향년 40에 생을 마감했다. 마흔밖에 안 되는 짧은 생애의 마지막은 조현병, 거식증, 간염 등으로 투병하다가 끝내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병원에서는 무연고자 취급을 받았다.

이중섭 화백이 세상을 떠나고 60주기 기일 9월6일 제주도 서귀포에서 ‘이중섭 추모 세미나’가 열렸다. 서울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는 이중섭 화백 일대기를 그린 <길 떠나는 가족> 시연회에 앞서 무대에서 제(祭)를 올렸다. ‘길 떠나는 가족’은 이중섭이 소가 끄는 달구지를 몰고 아내와 두 아들이 타고 가는 장면을 종이에 그린 25.7×10.5cm 크기의 유채화다.

‘길 떠나는 가족’은 1991년 초연(初演)된 작품으로 이중섭의 그림을 배우들이 연극적으로 재현하는 등 새로운 기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규모가 큰 작품이라 지금까지 많이 공연되지 못했다. 지난 3월 콜롬비아공연에서는 전회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중섭, 백년의 신화(100th Anniversary of Korean Modern Master, Lee Jung Seob) 전시회가 국내 미술 전시 사상 대기록으로 한국작가 개인전 첫 20만명을 돌파하여 이중섭의 명성을 입증했다. 6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개막한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9월18일 총 관람객 20만명을 돌파했다.

대개 전시회의 블록버스터(blockbuster)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관람객 수가 10만명이므로 이중섭전은 두 배를 넘겨 미술 전시의 새 역사를 썼다. 서울 전시는 10월 3일에 막을 내리고 이중섭이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했던 부산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가 10월 20일부터 내년 2월 26일까지 이어진다.

대향(大鄕)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주운면 송천리 부농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長水 李氏 李熙周)가 별세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그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중섭은 평양농공은행장 및 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외조부 이진태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이중섭이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에 반발하여 한글자모(字母)로 회화적 콤퍼지션(composition)을 많이 그렸으며,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작품에 풀어쓰기 한글(ㅈㅜoㅅㅓㅂ) 외에 영문이나 다른 글로 서명을 한 일이 전혀 없다.

이중섭은 1934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동경 제국미술학교에서 1년 수학한 후 a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했다. 이중섭이 한지에 먹물을 칠하고 긁어낸 그림은 하나하나가 벽화를 연상시키는 역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중섭은 미술해부학에 열중하고 인체와 동물의 골격 습작을 되풀이 했다.

문화학원 졸업 후 이중섭은 동경에 계속 체류하면서 1940년 일본화단의 새로운 미술운동의 추진체였던 미술창작가협회 주최 제4회전에 유화 <소와 소녀>와 연필화 소품 <불상>을 출품하여 상을 받았다. 1942년 4월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와 어린이>를 출품했다. 그리고 5월에는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제2회 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45년 5월 일본 문화학원 후배이며 전일본창고주식회사 사장의 딸인 야마모도 마사꼬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신 현해탄을 넘어 원산에 와서 이중섭과 결혼했다. 결혼 후 아내에게 한국이름 이남덕(李南德)을 지어주었다. 1946년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으나 그림 제작에 지장이 있다며 곧 사직한 후 집에서 닭을 기르면서 닭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1946년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디프테리아로 사망했으며, 이듬해 둘째 아들(泰賢)이 태어났다. 평양에서 8·15기념 전람회에 출품했으며, 모스크바에서 온 소련 평론가로부터 이중섭은 구라파의 어떤 대가들에게 비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화가라고 평했다. 원산 신미술가협회가 결성되고 회장으로 선출됐다. 1949년 셋째 아들(泰成)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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