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59] 탄핵정국서 금배지 단 그들, 지금은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갈라서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무슨 권리로 탄핵하느냐는 비판여론과 일정 유권자들의 정치적 항심을 등에 업은 인사들의 각개약진은 ‘변절’이라든지 ‘야합’이란 혹평을 피하기 좋도록 재해석되고 있었다. 얼마 후 현실로 드러난 열린우리당의 압승은 그 판단이 명민한 ‘것’이었음을 고스란히 반증한다. 이른바 자발적 일탈효과가 긍정적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경우로 기록될 터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탄핵 역풍은 열린우리당의 과잉성장을 담보한다. 게다가 특정 정당의 과잉성장이 다시 조기소멸로 이어지는 한계도 이 땅의 정치문화에선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경우 국민적 실망은 더했다. 민주당과의 분당 형식을 밟는 창당의 기형성은 물론, ‘급성장-과분화(過分化)’의 내재적 한계를 바탕으로 삼는 당의 경쟁구조는 ‘계파정치 종식’을 선언한 최고 권력의 의지와 관계없이 또 다른 권력투쟁을 향해 깊어가고 있었다.

짧은 세월이었지만 열린우리당의 계파분화와 그에 따른 정치적 경쟁 심화는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추종세력과 대선 후보군으로 편입한 정동영의 세를 중심으로 가닥을 잡고 그들 주변에 ‘김근태·천정배·신기남·유시민’ 등이 새롭게 모여드는 형국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다음 표는 당시 상황을 잘 압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띠는 변화는 정치신인들의 대거입성이다. 열린우리당의 정치신인이 당선자의 71.7%인 109명에 달한다는 사실과 그들 또한 어쩔 수 없이 일정 계파에 몸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과거는 이 땅의 정치문화를 극명하게 대변한다. 하지만 그들이 입 모아 강변하고자 애쓴 대목은 따로 있다. 변화가 있다면 그건 적어도 돈과 권력에 의한 조종이나 이합집산이 아니라 이념과 의지의 소산이란 변명일 터였다.

의원들 대부분이 지니는 참신성보다 조율과 양보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는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합목적성을 잠식한다. 이는 4년여에 걸친 단명정당의 한계를 유인한 또 하나의 치명적 변수다. 아무리 이념과 소신으로 넘쳐나는 개혁정당이었던들, ‘그들’ 역시 출신과 학연, 지역과 운동의 경험지평 등에서 두드러진 차별성을 드러냈고 이를 일거에 허물거나 정치적 흉금을 틀만큼 감동적 면모를 보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당들이 권력교체기에 즈음하여 수권(授權)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창당을 서둘렀던 데 반해 정권을 장악한 다음 당의 면모를 갖추고 전환기 정치질서의 주도권을 지탱하려 했던 점은 열린우리당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남는다. 하지만 득표와 공직을 추구하고 정책 입안과 집행을 강하게 의식했을망정, 정치적 개성의 지나친 돌출과 이질적 성분의 화학적 조절에 실패한 한계는 계파정치의 종식을 겨냥한 목표의 원대함마저 무색하게 만든다.

표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이 같은 까닭에서다. 모두가 한결같이 정책개발과 입법연구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폭넓게 퍼져나간 당내 소모임과 이들의 지속적 생장은 결국 당내 주도권 장악을 향한 계파분화의 전조로밖에 달리 비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여정치연구회’ 등 10개가 넘는 당내 소모임 활동은 곧 세의 규합만이 정치적 생존의 지름길임을 반증했고 초·재선 그룹 가운데 친노계가 가장 활발했던 건 역시 측근의 위세와 이를 잃지 않고자 강하게 의식한 정치적 자기중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총선압승으로 당세확장이 분명해지자 앞 다퉈 소모임 결성에 열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같은 행각이 미칠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내다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지나친 견제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 효율이나 합리적 경쟁을 갉아먹는 장해였다. 물론 최고권력으로부터의 정치적 인정과 조속한 ‘세’의 안정화는 모임결성동기의 상수로 작동하고 있었고 멤버의 확장과 확연한 관심 추를 지탱하는 일은 본능이었다.

과열 조짐을 보일망정, 이 같은 경쟁이 문자 그대로 정책개발과 법안연구를 위한 공익증대나 그 제도적·인적 기초가 될 수만 있었다면 우려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념과 소신에 의한 계파운용이 과거 파벌작동의 한계를 대체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노무현의 영향력은 대권장악 후 예전만 못했고 그를 향한 정치적 구애가 나아가 편애나 눈먼 사랑으로까지 발전할 가망이란 별로 없었다는 데 그들의 고민은 깊었다. 대신 모임의 난립과 과당경쟁이 어쩌지 못할 계파충돌이나 그 온존으로 퇴행할 가능성 역시 비례하고 있었다는 데 문제의 여지는 적잖았다.

One comment

Leave a Reply to 김나리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