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16회


“나는 친구를 사귀거나 관광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이곳을 라오스 최고의 리조트로 만들기 위해 온 것입니다.”
강 전무가 부임 자리에서 내뱉은 일성이었다. 주요 직원들과 정식으로 대면하는 자리에서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곧이어 각 부서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강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쓱쓱 메모해나갔다. 브리핑이 끝나자 그는 직원들의 얼굴을 한 바퀴 훑고는 이렇게 말했다.
“리조트 오픈까지는 정확히 68일 남았습니다. 오늘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내일까지 각 부서별 계획서를 제출하기 바랍니다. 오픈 당일까지 완수해야 할 업무 내용과 당면한 문제점 및 해결과제들을 중요도 순으로 기록해야 합니다. 최대한 상세하게.”
자리를 파하자마자 그는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해둔 순서도라도 있다는 듯이 일을 착착 진행하기 시작했다. 한나절 동안 호텔과 리조트 현장 곳곳을 둘러본 뒤 강 전무는 기준과 변형섭을 따로 불렀다.
“여긴 라오스가 아닐세.”
강 전무의 말에 두 사람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부터 여기가 라스베이거스 한 복판이라고 생각하게. 라오스는 잊어버려. 앞으로 이 리조트에서 라오스라는 이유로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야 하네.”
이어서 그는 성공적으로 호텔을 개관하기 위해서 반드시 개선해야 할 사항들을 설명해나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현장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솜씨에 기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 전무는 변 차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재 객실부에서 주안점을 두고 있는 업무는 뭔가?”
“직원 교육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교육방식은 맞지 않아. 내가 부서장들하고 협의해서 새롭게 진행할 테니 변 차장은 특별 임무를 맡도록 하게.”
“예?”
“앞으로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업무 기록들을 토대로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만들 생각이네. 내가 보관하고 있는 파일을 줄 테니 현지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해보게. 편의상 ‘라오 프로그램’이라 부르도록 하지. 전공을 살려서 최대한 빨리 완수해주게.”
갑자기 변형섭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다음 강 전무는 기준에게 두툼한 자료 뭉치를 건네주었다.
‘시설부 업무 지침’이란 제목이 검은 고딕체로 굵게 쓰여 있었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 아니라 여러 자료들을 묶어 만든 개인 소장용 자료였다.
“과거 여러 호텔들을 거치면서 엑기스만 뽑아 만든 자료일세. 제대로만 숙지하면 세계 어느 호텔에서도 충분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자부하네. 개관 때까지 시설부 직원들이 책에 쓰인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만들 수 있겠나?”
기준은 몇 페이지 들춰보았다. 한눈에 봐도 대단히 고급 과정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직원들의 현재 능력이 아니라 미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게. 호랑이는 병든 토끼를 잡을 때도 100% 전력을 다 쏟아 붓지. 배워야 할 점이야. 언제나 최고의 수준만을 목표로 삼아야 하네. 훗날 라오스의 모든 리조트 호텔들이 최고급 서비스를 지향하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 호텔을 거론하게 될 걸세. 라오스에서 세계적 수준의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곳이라고.”
기준과 변형섭은 잔뜩 고조된 기분으로 방을 나섰다.
“일해 볼 맛이 나겠군.”
변형섭은 곧장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예전에 ‘버림받은 프로그램’이라고 자조하던 파일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준은 일과가 끝난 뒤 숙소에 엎드려 강 전무가 준 업무지침서를 펼쳐들었다. 한 페이지씩 읽어가는 동안 학창시절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앉아 건축 관련 전공서적을 탐독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강 전무의 자료는 그대로 출판해도 될 만큼 상세하고도 체계적이었다.
‘한 번 해 볼만 하다!’

이튿날 오전, 1층의 트윈 룸에서 재미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두 명의 룸메이드가 각각 침대 앞에 서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강 전무는 마치 심판처럼 스톱워치를 들고 있었다. 객실 매니저인 변 차장을 비롯하여 하우스키핑 부서의 전 직원들, 심지어는 타 부서의 직원들까지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레디- 고!”
강 전무가 신호를 하자 두 명의 룸메이드는 신속한 동작으로 침대를 꾸미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패드를 펴고 1번 시트를 끼운 뒤 2번 시트와 담요, 베개, 베드 스프레드를 차례차례 손질해가는 동안 양쪽 룸메이드의 속도와 모양새가 점점 차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왼쪽 룸메이드가 마무리를 끝냈다. 잠시 후 오른쪽 룸메이드까지 끝내고 나자 강 전무는 스톱워치를 누르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직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1분 45초! 더 빨리 정리를 끝냈으면서도 침대 상태가 훨씬 깔끔하지 않은가? 더 빨리 하면서도 완벽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강 전무는 두 침대를 차례차례 가리키며 연설을 계속했다.
“작업 순서다. 낭비 동작을 철저하게 없앤 ‘순도 100%’의 작업 순서!”
수첩을 꺼내어 메모하는 직원들도 보였다. 기준이 이곳에 온 이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강 전무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효과적인 순서를 따르게 되면 속도와 완성도는 물론 맡은 임무에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리하다. 객실뿐만 아니라 어느 부서도 마찬가지. 앞으로 일주일간 부서별로 가장 효율적인 작업 순서를 찾아 몸에 밸 때까지 연습할 것! 부서장들은 이러한 순서들을 대상으로 최대한 개선 과정을 거쳐 매뉴얼화 하도록! 자, 다음은 프런트데스크로!”
강 전무가 방을 나가자 직원들도 줄줄이 뒤를 따랐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순간도 대충대충 살아본 적이 없는 인물 같았다. 누구보다 크고 높은 청사진을 머릿속에 그려놓고서 단시간에 조직을 장악하고, 각 부문이 이뤄내야 할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정의내린 뒤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개관이 연기된 결정적인 원인은 호텔 시설의 부실 문제 때문이었지만 강 전무의 진단은 달랐다. 그는 시설 점검에 신경 쓰기보다는 오히려 전 부서를 대상으로 가장 기초적인 업무부터 새롭게 다져나갔다.
프런트데스크에서는 예약업무와 객실배정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현관에서는 벨맨 등을 대상으로 전반적인 유니폼 서비스에 대해서……, 강 전무는 부임 이틀 째 되는 날을 그렇게 보냈다. 다음 날은 커피숍과 바, 레스토랑, 그 다음 날은 시설부서로 행진해가며 질서정연하게 정비해나갔다.
그 사이 강 전무에게 ‘스톱워치’라는 별명이 붙더니 금세 ‘시계태엽’으로 바뀌었다. 입만 열면 시계태엽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조직을 강조한 탓이었다. 그는 직선적이고 깔끔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도저히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덕분에 풀린 나사가 꽉 조여지듯 직원들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2차시기가 없습니다. 호텔은 1차시기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첫인상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고객이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작은 실수 하나조차 만회할 기회가 없습니다. 따라서 각 부서와 전 직원들은 완벽한 서비스를 위해 절대로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매뉴얼을 철저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 개관까지는 정확히 두 달! 이 기간 동안 여러분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매뉴얼을 지닌 전문가가 되길 바랍니다. 이상!”
첫 일주일을 종횡무진 활약한 뒤 강 전무는 그렇게 현장에서 반걸음 물러났다. 이후로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부서장들을 만나가며 진행 상황을 체크해나갔다.
그는 D-1을 100%로 정하고 현재 시점까지 역산하여 단계별 성취 목표와 내용을 이미 마련해놓고 있었다. 부서장들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고, 그 미션은 곧 직원들에게 전해졌다. 일과가 끝나면 직원들은 각자의 업무일지를 꼼꼼히 정리하여 부서장에게 보고했고, 부서장들은 그것을 종합하여 강 전무에게 전달했다. 강 전무는 늦은 밤까지 검토한 자료들을 토대로 다음 단계, 또 그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일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기준은 내심 리조트에 가장 필요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다소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고 또 결과를 책임져야 했지만 강 전무가 온 뒤로 상황이 바뀌었다. 기준에게는 이제 믿을 수 있는 매뉴얼이 생겼고, 결과에 대해 확신을 지닌 상사가 생긴 것이다.
두툼한 매뉴얼을 읽어가며 보일러실과 변전실, 조명실, 방송실 등 시설부의 각 작업장을 뛰어다니는 동안 기준은 서서히 업무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시설부 직원 모두가 기대만큼 따라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준의 지시대로 움직여주고 있었으며, 몇몇 총명한 이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능률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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