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성의 커피종교학] 종교와 술, 그리고 커피의 상관관계

<사진=CCA>

[아시아엔=최우성 인덕대 교양학부 외래교수, 커피비평가협회(CCA) 서울본부장]?맥주의 고향은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이 독일을 맥주의 고향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맥주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7천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모뉴멘트 블루(Monument Blue)에는 방아를 찧고 맥주를 빚어 여신에게 바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수메르유적을 통해서 인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선사시대 이전부터 맥주를 만들어 마셔왔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보리를 발효시킨 음료를 즐겨왔으며, 심지어 일군들의 품삯으로 계산해 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때에는 호프를 추가하지 않고, 걸러내지 않은 걸쭉한 형태였고, 여기에는 각종 미네랄이 풍부해서 한 끼 식사 대용품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들은 태양신 ‘오시리스’를 비롯한 각종 신들을 섬겼는데, 이교적인 제사 이후에 맥주파티가 벌어졌을 것이다. 이집트 신화에는 태양 신 ‘오시리스’가 그의 아내 ‘이시스’의 도움으로 맥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맥주의 흔적은 고대 이집트 유적들에서 자주 발견이 된다. 이를 통하여 당시에 얼마나 대중적으로 맥주를 즐겼는지 알 수 있다.

포도주의 고향은 어디일까? 포도나무가 잘 자라나는 지중해 연안의 아주 오래된 고대도시들에서도 포도나무가 경작되었고, 이를 포도주로 만들어 마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이 귀했던 고대 국가에서는 포도주를 물처럼 마시기도 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스파이들을 보냈을 때에, 그들은 사람 머리만한 포도송이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약간의 과장법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커다란 포도송이들이 비옥한 팔레스타인의 토양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보다 더 앞선 기록은 성경 창세기에 나온다. 전 우주적인 홍수 재앙을 맞이하여 파괴되었던 땅에 드디어 물이 다 마르고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인류 최초의 포도농사꾼은 노아였다. 홍수 이후 살아남은 사람 ‘노아’는 그 땅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만취(漫醉)의 기록도 단연 노아가 앞서 있다. 노아는 포도를 수확하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든다. 그리고 집 안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어 버린다. 노아의 아들들은 이미 혼인한 상태였고, 며느리도 세 명이나 있었다. 노아가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잠이 들어 버린 상태에서 그의 아들 중에 ‘함’이라는 아들이 이 모습을 보고 밖에 나와서 아버지를 조롱했다. 하지만 다른 두 아들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아버지의 몸에 옷을 덮어주었고, 이 일로 인해서 ‘함’은 저주를 받고, 다른 두 아들은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신 첫 번째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일이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며, 제자들과 함께 마신 최후의 음료가 포도주였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도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로마식 표현: 박카스)가 포도나무 재배법과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멀리 인도까지 가서 포도주를 전파했다고 하니, 포도주가 그리스 신화의 음료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유럽에 음료로 전파된 것은 맥주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 하지만 초기에 대중적인 인기를 끈 것은 포도주였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포도주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땅에 포도나무를 심고, 거기에서 포도주를 추출했다. 포도주는 일조량이 부족하고 추운 유럽의 기후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음료가 되었다. 하지만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침략과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일어난 백년전쟁(1337~1453년)으로 인해 대부분의 포도농장이 파괴되었고, 비옥했던 토양도 황폐화됐다. 포도주의 생산이 어렵게 되자 술이 필요한 사람들은 맥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맥주는 포도주를 대체할만한 음료이기는 했지만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다. 맥주가 대중화되면서 술에 취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인 문제들이 발생했고, 이것은 기독교 국가의 명예를 실추하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다. 실제로, 독일의 한 군주는 회의석상에서 자기의 옷에 일부러 소변을 보기도 했다. 맥주를 마시면 포도주를 마실 때보다 더 많이 취했고, 술에 취해서 하는 행동은 대부분 용납되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독일의 작센 주 선제후는 자기의 식당에 개와 돼지의 그림을 그려놓고, “누구든지 맥주를 지나치게 마시는 사람은 개나 돼지의 형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지나친 비만이었다. 맥주에는 각종 미네랄이 풍부해서 맥주를 많이 마시는 사람은 몸집이 커지고 살이 지나치게 찌는 일들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사람들은 마른 체형을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가 나오고 살이 찐 체형이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영양가가 많은 맥주는 사람들의 더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지나친 비만으로 자기 위에 탄 주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말이 쓰러져 죽는 등 많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맥주를 대신할 다른 음료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CCA>

커피가 맥주와 포도주를 대체할 음료로 부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가 유럽으로 전파된 것은 1683년 ‘오스만 투르크’의 오스트리아 빈 공방전 때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빈’에서 커피를 판매하는 유럽 최초의 카페가 생겼다. 그러나 한 동안 사람들은 커피를 의약품의 일종으로만 알고 있고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커피는 작지만 조용히 유럽 기독교 문명을 흔드는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이슬람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를 기독교 문화가 수용하는 것에는 상당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키며 사회에 혼란을 주는 술이 아닌 대안으로 커피가 떠오르게 된 것이다.

약간의 술은 종교적 감성을 일깨워 준다. 하지만 그 이상의 술은 종교적 영성을 감퇴시키며 결국에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주는 등 해로운 점이 많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서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는 것은 술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력이 부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술과 마찬가지로 커피도 중독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커피의 중독성은 술에 비할 바가 아니며, 커피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는 커피를 전문가 수준으로 즐기는 목사님들이 많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도 이미 커피를 전문가 수준으로 즐기는 스님들도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이전에는 템플 스테이에서 스님들이 차를 내려서 손님들에게 대접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절에서 스님이 직접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하니 커피의 힘이 새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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