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3일] 이란의 자부심 위성로켓 발사성공

2010년 이란, 자체 제작 위성로켓 발사 성공

2010년 2월3일 이란이 자체 제작한 위성로켓 ‘카보슈가르(탐험가)3호’ 발사에 성공했다. 2009년 2월3일 자체 제작 위성을 발사한 지 꼭 1년만의 일이었다. ‘카보슈가르’에는 실험용 쥐·거북 등이 담긴 캡슐이 탑재됐다.

당시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위성발사 기술이 장거리 탄도 미사일 기술로도 전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란이 핵폭탄과 미사일 운반체계를 구축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날 국영 티브이를 통해 발사 성공을 자축하는 연설을 했고, 지구촌을 향해 로켓개발 능력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란은 지난 2011년에 원숭이를 태운 캡슐을 ‘카보시가르 5호’ 로켓에 탑재해 발사했으나 실패했다. 이란은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2013년 1월28일(현지시각) 원숭이를 실은 로켓을 우주로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란 국방부 산하 항공우주국은 성명에서 “원숭이를 캡슐에 넣어 성공적으로 발사, 온전한 상태로 다시 지상에서 되찾았다”고 밝혔다.

이 원숭이는 120km 고도에서 준궤도 비행(sub-orbital flight)을 한 뒤 살아서 되돌아왔다.

서방은 준궤도 비행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란의 이러한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경계하고 있다.

2007년 바그다드 자폭테러 130여명 사망, 300여명 부상

2007년 2월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트럭을 동원한 자폭 테러가 발생, 132명이 숨지고 최소 305명이 다쳤다. 2003년 3월 이라크전쟁 개전 이래, 단일 폭탄테러로서는 최대였고 개전 이래 두 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냈다.

2006년 11월23일 6차례의 연쇄 폭발 테러가 자행된 사드르시티 폭탄 테러가 역대 최다 사망자(215명)를 냈다. 단 한 차례의 폭탄테러로서는 이날 바그다드 트럭 자폭테러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런 끔찍한 기록이 비열한 테러리스트들의 기록경신 욕구를 자극하지 말기를 바라며.

2006년 이집트 여객선 ‘알-살람 보카치오 98호’ 침몰

2006년 2월3일 승객과 승무원 약 1500여명을 태우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나 이집트로 가던 이집트 대형 여객선 ‘알-살람 보카치오 98호’가 홍해에서 침몰했다. 사고 선박의 도착 예정지였던 이집트 사파가항 인근에서 구조된 240여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배는 2월2일 오후 7시 사우디의 두바항을 출발한 뒤 실종됐으며 이집트의 연안 도시 후르가다에서 약 57마일 떨어진 홍해상에서 3일 새벽 0~2시 사이에 침몰했다.

1975년 이집트 가수 움 칼툼 타계

1975년 2월3일 ‘카우카브 엘 샤르크(동방의 별)’, ‘아랍의 목소리’로 불리던 아랍 최고의 여가수 움 칼툼이 영면했다. 향년 75세.

이집트 다칼리야 주(州) 만수라 출신인 움 칼툼은 이맘(이슬람 성직자)이던 아버지의 지도로 아랍 음악의 거장인 작곡가 모하메드 엘 카사브기를 만나 고전 음악부터 배웠다. 그 뒤 무대와 영화 등을 통해 대중을 만나면서 ‘음악을 통해 슬픔을 끌어안는 아랍의 어머니’로 변모해갔다. 1932년 시리아·이라크·레바논 순회공연에 나섰다. 그녀의 호소력 짙고 힘 있는 목소리는 아랍을 열광시켰다.

2차 세계대전 뒤 이스라엘이 건국해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나고 아랍 전역이 슬픔과 분노에 잠겼을 때, 그녀의 노래는 아랍인들의 마음을 달래줬다.

움칼튼은 나세르 혁명이후 옛 왕실을 위해 노래한 적이 있는데 당시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정부가 그녀의 노래를 방송 금지 처분했다. 당시 나세르는 “이집트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은가”라며 즉각 방송금지를 무효화 하도록 했다.

1966년 소련 ‘루나9호’ 달 표면 연착륙 성공

1966년 2월3일 소련의 무인 달 탐사 우주선 루나 9호가 처음으로 달에 연착륙했다. 그해 1월31일 발사된 루나 9호는 달의 ‘고요한 바다’에 착륙해 지구 시간으로 이튿날인 4일 오후 11시50분부터 달 표면의 사진을 지구로 전송했다.

소련이 연착륙을 위한 역추진 로케트 분화점 기술을 극복했음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또 달 표면이 딱딱하다는 것도 확인된 계기였다.

루나9호가 보내온 달 표면 사진을 보면 달 표면에 먼지가 보이지 않고 요철이 심했다. 직경 10cm에서 2~3m에 이르는 돌 모양의 물체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달의 ‘고요한 바다’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까 평평하지 않음이 확인된 것이다.

미국은 소련보다 4개월 늦은 같은 해 5월30일에 서베이어 1호를 발사, 달의 ‘폭풍우의 대양’ 지역 연착륙에 성공했다.

1930년 호치민, 홍콩서 베트남공산당 결성

1930년 2월3일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이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했다. 베트남 내 3개 지역에서 따로 활동하던 3개 공산당이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고, 이때부터 3개 공산당이 홍콩소재 베트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1개국 1공산당’이라는 코민테른의 국제지도방침을 따른 조치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호치민이 3개 공산당 대표를 홍콩으로 비밀리에 소집해 이뤄졌다. 제3인터내셔널로도 불리는 코민테른은 레닌의 발기에 의해 창설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국제적 조직체였다.

호치민은 이에 앞서 1911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가했다. 1923년 소련으로 들어가 코민테른 활동가로 활동하다 1924년 소련고문단의 한사람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에도 파견됐다. 이후 중국 광주에서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조직해 조국해방에 전력투구했다.

호치민은 1929년 코민테른이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운동가들을 위해 모스크바에 세운 국제레닌학교에서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 등 한국 출신 공산주의자들과도 함께 공부했다. 호치민은 박헌영이 건네 준 <목민심서>를 늘 머리맡에 두고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 늘 검소한 옷차림과 따뜻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호찌민을 베트남 사람들은 그가 주석이 된 이후에도 ‘호 아저씨’라고 불렀던 것. <호치민 평전>의 저자인 윌리엄 듀이커는 그를 “반은 레닌, 반은 간디”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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