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진보쵸를 아시나요?

10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가장 큰 방을 서재로 꾸몄다. 풍수지리상 안방(가장 큰 방)은 역시 부부가 써야 한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지만 “둘이서 꼭 껴안고 자기에 이 방은 너무 크다”고 우기면서 벽 하나를 책꽂이로 채웠다. 그리고 책상을 3개 들여놓았다. 방이 4개인 집을 마련하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다.

책장을 4분의 1로 구분하고 네 사람의 책을 나누어 꽂았다. 하나의 책상에는 컴퓨터를 올렸다. 나와 남편이 같이 쓸 책상이다. 하나의 책상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 또 하나의 책상은 3학년이 되는 아들의 책상이다. 서로 마주보게 꾸미고 나니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아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책상을 자기 방으로 옮기겠다고 했고, 덩달아 딸도 그의 방으로 가져갔다. 얼마 전 고등학생인 아들이 ‘책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봤는데,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가 무척 서운해 했지만 나는 그렇게 했고, 거기서 나의 꿈을 키워갔다…”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서운했던 건 사실이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걸 알고 있었다고 하니, 에미가 자식을 키우는지 자식이 에미를 키우는지 모를 일이다.

고등학생이 되는 딸아이가 책상을 다시 서재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공부를 하는데 누군가가 봐주기를 바란다는 거다. 9시뉴스를 보면서 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작업이 시작되었다.

책상을 옮기는 건 문제가 아니다. 책상이 빠진 딸아이의 방은 아늑하고 여유로운 공간으로 바뀌어 대만족이지만, 서재가 문제다. 나는 책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 본 그림책들을 꺼내서 박스에 담았다. 논문을 쓸 때 보았던 자료들도 박스에 담았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리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것저것 작은 수레 하나는 될 것 같다. 백과사전이니 위인전, 만화한국사 등 전집만 해도 여섯 질이나 된다. 당장 헌책방으로 연락을 했더니 담당자가 달려왔다. 그런데 너무 오래된 것들이라 가져가지 않겠다면서, 폐지처리장 연락처를 주었다. 그도 나도 유쾌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한권 한권 손때와 함께 소중한 기억이 묻은 것들이라 그냥 버리기는 아쉬웠다. 착한 신랑은 전집을 차에 실고 가평 꽃동네로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나머지는 박스에 담아서 지하 분리수거장으로 옮겼다. 서재에서 엄청난 양이 빠져나갔다. 그 무게만큼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도 정리되었다.

원폭도 피한 일본의 고서점가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방학이면 일본으로 갔다. 학우들이 고향집으로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중고등학교 때의 친구도 만났다. 그러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교수님과 선배들로부터 부탁받은 책들을 구하러 서점가 나들이를 했다. 굳이 공부와 관계된 일을 했다면 이 정도일 게다.

도쿄에는 헌책방이 밀집된 곳이 몇 군데 있다. 간다진보쵸(神田神保町)의 고서점가, 도쿄대학 부근의 혼고(本?) 고서점가, 와세다 고서점가. 특히 진보쵸는 세계 제일을 자랑한다.

2차대전시 미군이 도쿄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진보쵸 때문이라는 일화가 있다. ‘이곳의 책들이 타버리는 것은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니 진보쵸의 고서점가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세계가, 역사가 그 소중함을 알고 지켜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쵸 고서점가의 역사는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의 전신인 메이지 법률학교, 쥬오대학(中央大學)의 전신인 이기리스 법률학교, 니혼대학(日本大學)의 전신인 니혼 법률학교가 설립되자 동시에 법률서를 다루는 서점들이 마구 들어섰다. 이후 각 대학에 다양한 학부가 생겨나고, 각 전문분야별로 차별화된 서점이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문학, 역사, 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등.

역사 중에서도 동양사학을 집중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있었고, 나의 단골집도 있었다.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는 방학 때마다 찾아오는 서울의 대학생을 훌륭한 역사학도로 착각하고 이것저것 퍼주기 바빴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런 대접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인양 부탁받은 책들을 찾았다. 간혹 나를 위한 책도 한두 권은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한 고서 판매가 이루어지면서 고서점가를 직접 찾아가는 일도 많지 않다. 키보드를 몇 번 클릭하는 것만으로 집까지 배달되니 말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배낭 가득 책을 채우고 진보쵸를 헤매고 다닌 그 날들이 기억난다. 고서점가의 큼큼한 냄새가 진한 커피향처럼 다가온다.

비우지 않으면 다시 채울 수 없다

그때 구입한 책들도 이제는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박스에 담는데 마음이 무겁다. 그 시절의 추억마저 버리는 것 같아서, 몰래 한두 권 빼서 뒤에 숨겼다. 책을 정리한다는 것은 육체적 노동의 피로함보다 과거의 기억들을 정리해야 하는 마음의 서운함이 더 힘들다. 그래도 비우지 않으면 다시 채울 수 없음을 알기에 과감하게 테이프를 붙였다.

엄청난 양을 정리하니 책장 한두 칸이 비었다.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로시카를 장식했다. 인형 몸체 속에 조금 작은 인형이 들어있고 그 안에 또 더 작은 인형이 들어있는데, 콩알 만한 인형까지 꺼내니 모두 5개다. 이전에는 몰랐었다.

4 comments

  1. 교수님!! 값진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요즘 저의 가장 큰 행복은 6살, 4살난 딸들과 아내와 함께 한 방에서 큰 이불을 두개 펴고 함께 자고 춤추고, 장난치는 일 입니다.
    그 아이들도 커가면서 각자의 공간을 원하겠지요. ^^

    일본어를 전공한 일본학도로써, 도쿄에 진보쵸는 많이 들어 봤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네요. 기억해 뒀다고 나중에 꼭 한번 가봐야겠어요.

    오늘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독자 올림.

  2. 교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가끔 시내에 나갈 때 진보쵸로 직접 발걸음을 옮겨보면 같은 분야의 고서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어 공부가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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