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후 장군③정일권] 처신과 외교의 달인···이승만·박정희 신임 독차지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승만 대통령이 이형근, 백선엽, 정일권 3명을 대장으로 만들었는데, 국민들의 기억 속에는 정일권 장군보다는 정일권 국무총리로 더 알려져 있다. 정일권은 채병덕이 물러난 이후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듣도 보도 못한 이 직함은 이승만의 고안이었다. 이렇게 엄청나야 북한군이 “정일권이 누군가?”하고 겁을 집어먹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참 짓궂은 75세 노인이었다.

그러나 육해공군 총사령관의 직함은 허명이었다. 1950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 이양하였다. 국군이 후퇴를 연속하는 가운데 정일권의 참모총장으로서 역할과 기능은 별로 없었다.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상대하였고 지상전은 8군사령관이 지휘하였으므로, 육군참모총장은 동원업무나 챙기는 실정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대부대 지휘경험이 별로 없는 정일권을 보완하기 위해 속성 과정으로 사단장, 군단장을 시켰는데, 정일권의 담당 전선이 위기에 처할 때에는 백선엽을 투입하여 막았다. 정일권은 이승만 대통령을 지성으로 보좌하면서 미군들과의 관계도 무척 좋았다. 뒤에 박정희를 잘 모셔 7년 가까이 국무총리를 한 것도 이처럼 몸에 밴 탁월한 처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일권은 봉천군관학교 5기생이었다, 칼을 차고 말을 탄 정일권을 보고 매력을 느껴 군관학교에 들어갔다고 하는 후배들이 많을 정도로 정일권은 식민지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917년생으로 박정희와 동갑인 정일권은 만주군 출신 가운데 선배였다. 명목상으로는 원용덕이 최선임이었으나 그는 세브란스 의전 출신의 군의(軍醫) 중좌였기 때문에 만주군 출신의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다.

정일권은 함북 출신으로 평양 출신의 백선엽과 함께 자유당 시절 군의 양대산맥이었는데, 이북 출신은 박정희 정권에서 군의 주류에서 비켜나고 영남인맥이 주류가 된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정일권을 관동군 헌병대위 출신이라고 하나 이는 일본군 군제를 제대로 모르는 데서 나오는 이야기다. 관동군은 대일본제국 총군(總軍)이고 만주군은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僞滿)의 군대였다. 둘은 전혀 다르다. 어느 나라의 군대나 군관학교 수석 졸업자를 헌병장교로 만들지는 않는다. 진짜 관동군 헌병 오장(伍長)은 자유당 시절 특무대장 김창룡이었다. 또 일명 김성주 즉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동생으로 7.4 남북공동성명 당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이던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통역출신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막상 이것은 잘 모르는 모양이다.

박정희는 제3공화국의 초대 총리로는 최두선을 방탄총리로 내세웠지만 민정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정일권의 돌격내각을 내세웠다. 박정희는 세밀한 부분까지 직접 챙겼고 악역은 중앙정보부를 시켰으므로 정일권의 역할은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정일권은 6년7개월 국무총리에 있었는데, 정일권은 이승만을 모셨듯 박정희를 깍듯이 잘 모셨기 때문일 것이다. 정일권은 드물게 외교에 능한 군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후, 정일권을 주터키대사로 발령을 내었고 후에 주프랑스대사도 시켰다. 5.16당시에는 주미대사였다. 정일권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국무총리로 외무부장관도 겸했다.

정일권은 이승만, 박정희가 잘 활용하여, 충분히 한 역할 한 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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