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바보예찬···김수환·장기려·슈바이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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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말이 있다. 바보(糊塗)처럼 살아가기가 정말 어렵다(難)는 뜻이다. 이 말은 청나라 문학가 중 8대 괴인(怪人)으로 알려진 정판교(鄭板橋)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혼란한 세상에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면 화를 당하기 쉬우므로 자신의 색깔을 감추고 그저 바보인 척 인생을 살아가라는 교훈적인 말이다.

‘난득호도’는 13억 중국인들의 인생철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럼 왜 중국인들은 굳이 자신의 똑똑함을 감추려 하는 것일까?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잘남’을 감추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고도의 위장술이자 상대방을 안심시켜 좀 더 강한 공격을 하기 위한 전술에 해당한다고 한다.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면 상대방이 나를 시기하거나 경계할 것이고, 결국 나에게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도의 처세술 난득호도, 지혜로우나 어수룩한 척하고, 기교가 뛰어나나 서툰 척하고, 언변이 뛰어나나 어눌(語訥)한 척하고, 강하나 부드러운 척하고, 곧으나 휘어진 척하고, 전진하나 후퇴하는 척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아낌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은 분명 고수(高手)의 자질이 못 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깊은 속내와 지혜는 아는 것을 모조리 드러내놓는 총명함보다 분명 차원 높은 처세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살이의 어려움 앞에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여러 해 동안 같이 일해 온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반목하는 적이 되기도 한다. 어제의 친구가 갑자기 낯을 붉히며 멀어진다. 실수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나의 머리를 내리누르려 한다. 이런 갖가지 어려움은 뜻하지 않게, 그리고 미처 대응할 여력을 주지 않고 찾아든다. 정말 사람 노릇 제대로 하기도 어렵지만 세상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다.

300년 전 사람 정판교는 세상살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답을 주고 있다.

제 1편, 낮추는 것은 생존의 기술이다. 인간의 본성은 누구나 지기 싫어하고 나서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총명함과 재주를 드러내는 순간 누군가에 의해 ‘정을 맞는 돌’이 될 수 있다.

제 2편, 물러섬으로써 전진하는 책략을 쓰는 것이다. 모순관계에 있는 총명함과 어리석음, 전진과 후퇴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총명을 바보스러움에 감추고, 전진을 후퇴 속에 감추며, 후퇴함으로써 전진하는 책략으로 삼는 것이다.

제 3편, 화합의 원칙이다. 화합할 때 비로소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사람간의 교류를 물 한잔에 비유한다면, 화합이란 이 물 맛에 단맛을 더하는 것이다. 사소한 잘못을 따지지 않은 채 다함께 화목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듯해 보이지만 ‘어리숙한 척하는 처세’의 지혜이다.

제 4편, 누구와도 원만하게 처세하는 지혜다. 원만한 처세는 선한 인품과 충돌을 해결하는 지혜다.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또한 공통점을 추구하되, 차이를 인정하는 도량, 원한과 미움을 잊는 법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럼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는 누구일까? 손자(孫子)는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 중에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바보인척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했다. 진정한 승리자는 상대방을 굴복시킨 자가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이긴 자가 승리자다. 자신의 자존심을 희생할 줄 아는 자가 현명한 최후의 승리자가 되지 않을까?

노자(老子)도 “완전한 것은 모자란 듯하고, 충만한 것은 텅 빈 것같이 보인다. 뛰어난 기교는 서툴게 보이며, 뛰어난 웅변은 눌변(訥辯)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효용은 다함이 없다”고 했다. 어리석게 처세하는 바보는 당장은 낙오자처럼 보여도 세월이 흐른 후에는 승자로 우뚝 설 수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는 걸인이 돈을 구걸하자 현찰이 없어 수표를 줬다. 병원비를 못내 발이 묶인 환자에게 몰래 도망가라고 병원 뒷문을 열어준 일은 유명하다. 책 도둑에게 책 대신 돈을 가지고 도망치라 했던 일들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어느 해 설날, 장박사가 아끼던 제자가 세배를 올리자 덕담을 했다. “금년엔 날 닮아서 잘살아보게!”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 되게요.” 그러자 장박사는 웃으면서 “그렇지, 바보소리 들으면 자넨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줄 아는가”라고 했다.

필자도 찾아뵈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 바보로 살다가 선종(善終)을 하셨다. 어수룩한 자화상에 ‘바보야’로 이름붙이고 ‘안다고 나대고 대접만 받으려고 한 내가 바로 바보’라고 스스럼없이 말씀하셨다. 누가 칭찬이라도 하면 “아이고, 날 칭찬하지 마세요. 살아서 칭찬을 다 받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게 없어요”라고 하셨다.

<바보 존>의 저자 차동엽신부는 “당신 안에 숨겨진 바보를 찾으라. 밑지고 사는 것이 이기는 지름길이고, 훌륭한 바보들의 힘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했다. 너무 각박하고 야박한 세상, 온갖 얄팍한 처세술을 부리며 살아가기보다는 그저 바보처럼 살아가는 사람, 내 욕심만을 위해 상대방에게 피해주기보다 가진 것 없어도 충분하다고 스스로 자족하는 사람, 남에게 도움을 주고 바보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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