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30년 최대위기 맞은 신경숙 표절의혹···중앙·경향·한겨레의 사설·칼럼

 

[아시아엔=박호경 기자] 데뷔 30년을 맞은 한국 대표작가 중 한명인 신경숙(52)씨가 표절 시비에 휘말리며 작가로서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중앙일보>는 19일자 “최고 작가 도덕성 의심케 한 신경숙의 ‘해명’”이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한국 문학계, 아니 한국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작가와 출판사는 이번 표절 의혹에 대해 보다 솔직하고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며 “그것이 독자들에 대한 예의이자 자칫 한국 문단의 명예까지 실추시킬 수 있는 빅 스캔들을 전향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도 이날 ‘표절 논란 신경숙씨와 창비의 무책임한 태도’란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표절에 관한 법적인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묵과할 일이 아니다”며 “혹여 ‘패러디’니, 혼성모방(Pastiche·패스티시)’이니, ‘오마주’니 하는 변명으로 표절의 혐의를 벗어나서도 안되겠다”면서 “이번 기회에 건강한 비판을 억압하고 문단을 좀먹는 ‘침묵의 카르텔’을 깨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시아엔>은 두 신문의 사설과 <한겨레> 최재봉 선임기자의 칼럼 전문을 게재한다. ?

중앙일보 사설 전문

최고 작가 도덕성 의심케 한 신경숙의 ‘해명’

한국 문학계, 아니 한국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지난 16일 작가 이응준씨가, 신경숙 작가의 단편 ‘전설’(1996)이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平岡公威·1925~70)의 ‘우국(憂國)’ 일부를 표절했다고 주장하면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그간 문단과 출판계에서 표절 문제는 심심치 않게 터져왔지만 이번에는 얘기가 다르다. 신씨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펴낸 국내 최고 인기 작가인 데다가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 이후 해외에서까지 명성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신씨의 표절 의혹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충격적이다. 그간 프랑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작품과의 관련성이 지적된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필두로, 장편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와 단편 『작별 인사』가 각각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과 일부 유사성 논란이 일었다.

문단 일각에서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런 ‘전력’ 때문이다. 또 그간 표절 의혹이 유야무야된 데에는 스타 작가라는 신씨의 위상과 문학 권력의 봐주기 식 ‘주례사 비평’ 관행이 한몫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더욱 실망스러운 부분은 표절 의혹에 대해 신씨와 출판사가 내놓은 ‘해명’이다. 신씨는 “해당 소설은 알지도 못하고, 이런 논쟁은 작가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에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출판사 창작과비평 또한 “몇몇 문장을 근거로 표절 운운은 문제”라고 부인했다가 "적절치 못한 답변이었다”고 사과했다. 과연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유사한 문장을 구사하게 됐는지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간 궁색한 답변이 억지스럽기 짝이 없다. 국내 대표 작가로서 도덕성이나 책임감마저 의심스러운 태도다. 신씨는 단편 ‘딸기밭’(1999)에서 재미동포 안승준의 유고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의 일부를 도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도 “유가족에게 누가 될까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면서도 사과하지 않았다. 작가와 출판사는 이번 표절 의혹에 대해 보다 솔직하고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것이 독자들에 대한 예의이자 자칫 한국 문단의 명예까지 실추시킬 수 있는 빅 스캔들을 전향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경향신문 사설 전문

표절 논란 신경숙씨와 창비의 무책임한 태도

작가 이응준씨가 제기한 소설가 신경숙씨의 표절 의혹 파문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우선 신씨가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일부를 표절했다는 ‘전설’ 외에도 상당수 다른 작품들 역시 표절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와 <딸기밭> 등 신씨의 상당수 작품들 역시 표절이 분명하거나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문단 내부의 시비에 그치지 않고 문단 밖으로 확산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사회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있다.

우선 신씨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자신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상대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기왕의 표절 논란에도 명쾌한 설명 없이 넘어갔던 그는 이번에도 직접적인 입장표명 없이 출판사 창비를 통해 “ ‘우국’이라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몇몇 문장에서 유사성이 있어도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창비의 첫 반박성명은 군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제가 된 ‘우국’과 ‘전설’의 4~6개 문장은 절대 다수의 문인들로부터 표절이 맞는 것으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창비는 ‘신경숙 작가의 묘사가 (미시마보다) 더 비교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는 어이없는 코멘트까지 더했다. 뒤늦게 창비는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고 사과하면서도 표절이 아니라는 입장은 고수했다. 독재정권 시절 한국지성계의 상징이었던 ‘창비 정신’의 실종까지 운위됐다. 수익을 좇아 베스트셀러 작가를 비호하는 출판사와 그 출판사의 뒤에 숨는 작가의 모습은 한마디로 문화권력 간의 공생관계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문단에서는 표절 문제를 제기하는 이를 ‘내부고발자’라고 한다.

이응준씨도 이번에 매장당할 각오로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창작과 비평’이 자유로워야 할 문단이 이런 각오 없이는 발언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니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는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된다. 신씨와 창비의 오만한 대응도 과거 그런 관대함의 결과일 것이다. 표절에 관한 법적인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묵과할 일이 아니다. 혹여 ‘패러디’니, ‘혼성모방(Pastiche·패스티시)’이니, ‘오마주’니 하는 변명으로 표절의 혐의를 벗어나서도 안되겠다. 이번 기회에 건강한 비판을 억압하고 문단을 좀먹는 ‘침묵의 카르텔’을 깨기 바란다.

한편 <한겨레>는 최재봉 선임기자의 ‘최재봉의 문학으로’ 칼럼을 실었다.

“표절 비호하는 창비…진실보다 신경숙, 신경숙보다 돈”

다음은 최 기자의 칼럼 전문이다.

17일 오전 중국 칭다오의 호텔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은 뻥 뚫려 있었다. 차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가는 길 내내 500미터 간격으로 늘어선 경찰이 우리 일행이 탄 차의 운행을 위해 차량과 교통신호를 통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제3회 동아시아문학포럼을 주관한 중국작가협회 그리고 칭다오시 정부의 ‘권력’은 그토록 시원하고 달콤했다.

일주일 일정 행사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는 메르스를 걱정했는데, 표절이라는 뜻밖의 복병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논란의 진원지인 작가 이응준의 글에는 내 이름과 오래전에 쓴 기사도 등장해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작가 신경숙과 그의 대리인으로 나선 출판사 창비의 태도였다. 표절 대상으로 지목된 작품을 “알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은 믿기 어려웠고, 두 작품의 표절 혐의에 대해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을 가지고 따지더라도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창비 문학출판부의 ‘입장’은 설득력이 약했다.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인 이시영 시인도 트위터에서 “창비 문학출판부의 보도자료는 매우 적절치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시영 시인은 창비가 창작과비평사이던 시절 편집자로 출발해 부사장까지 역임한, 창비의 산증인과 같은 이다. 문제가 된 신경숙 단편 ‘전설’이 포함된 소설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1996) 역시 그가 그곳에 근무할 때 나온 책이다. 창비가 18일 저녁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한 점”을 사과한다는 대표 명의 성명을 내놓은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창비의 최초 보도자료가 적절치 않아 보인 까닭은 단순하다. 많은 사람이 표절로 보는데 표절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별다른 설득력도 없이 말이다. 창비의 보도자료는 ‘전설’과 미시마 유키오 단편 ‘우국’이 “성애에 눈뜨는 신혼 장면 묘사”라는 “일상적인 소재” 말고는 공통점이 없으며 그 묘사 역시 “작품 전체를 좌우할 독창적인 묘사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1936년 천황 지지 장교들의 친위 쿠데타와 1950년 한국전쟁 참전 장교 사이에는 물론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쿠데타 참가와 전쟁 참전이라는 대의와 신혼의 개인적 행복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개인’을 버리고 ‘대의’를 택하며 그 결과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공통점이 결코 작다고는 하기 어렵다. 게다가 문제가 된 문장들 사이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조차 부정하는 안목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 문장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체적 열락의 강렬함과 절박함은 이윽고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한층 도드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비가 이렇듯 명백한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모두가 짐작하듯이 신경숙이 ‘잘 팔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칭다오 공항으로 가는 길에 경험한 권력과 달리 한국 출판계의 권력은 곧 ‘돈’이다. 몇몇 잘 팔리는 작가와 그를 비호하는 주요 문학출판사의 평론가 편집위원 그리고 고액 문학상 운영을 통해 그들과 결탁한 언론으로 이루어진 ‘문학권력’은 실체가 없는 뜬소문이 아니다. 권력의 달콤함에 작가와 출판사가 초심을 잃었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면밀하게, 정직하게 응시하지 않고는 한국문학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고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페이스북에 썼다. 평론가 이명원도 “작가 신경숙과 창비의 대응 태도는 한국문학 전체에 대한 독자의 냉소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응준의 문제제기는 단순히 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 한국문학의 앞날을 가늠할 중요한 시험대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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