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보살통’으로 강력범죄 예방교육 시켰으면···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보살통(菩薩筒)이란 게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해도 날씨가 추워져 옷을 껴입기 시작하면 몸에 이가 생겼다. 해충이기 때문에 손톱으로 톡톡 눌러 죽였다. 하지만 옛 스님들은 이도 함부로 잡지 못하도록 했다. 특히 아이들이 함부로 살생하는 습관에 물들지 않도록 유의했다.

그래서 대나무로 보살통이라는 걸 만들어 두고 그 안에다 이를 잡아넣어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 아이들에게는 이가 곤충이 되어 날아간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옛 사람들은 이같이 아이들에게 생명존중사상을 가르쳤다.

그런데 요즘 생명경시사상이 물들어 살생은 물론 살인까지 서슴지 않아 가슴이 미어진다. 필자도 한 때 사냥총을 사서 짐승을 자으러 다닌 적이 있다. 다행인지 참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대신 악동들과 함께 임진강변의 어떤 농가에서 노루 한 마리를 추렴한 적은 있다.

그후, 일원대도(一圓大道)에 귀의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알게 된 후 즉각 총을 팔아 버렸다. 그리고는 깊은 참회에 들었다. 그 이후에는 모르고는 몰라도 알고서는 거의 살생을 저지른 적이 없다. 심지어 낚시는 물론이고 TV에서 피 흘리는 장면까지 외면한다.

연고(緣故)없이 살생을 말라는 게 원불교의 불살생의 계율이다. 연고가 붙은 이유는 살생을 생업(生業)으로 하는 사람들의 숨통을 열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예로부터 불교의 불살생의 영향으로 짐승에게 가해하거나 살생을 하면 반드시 보복 받는다는 업보(業報)사상에 투철했다.

조선 태종 11년에 처음으로 들여온 코끼리를 사복시(司僕寺)에서 길렀는데 이를 구경하던 공조(工曹)의 한 벼슬아치가 추하게 생겼다고 침을 뱉자 코끼리가 코로 말아 땅에 내리치는 바람에 죽는 변이 있었다. 전생 불(前生佛)로 외경(畏敬) 되는 코끼리인지라 이 벼슬아치의 죽음은 자업자득의 업보로 인식되었다.

어릴 적, 벌에 쏘이면 할머니는 쏘인 환부에 된장을 발라주며 “너 혹시 참외밭 서리하러 갔다가 쏘인 것 아니냐? 남의 집 닭장에서 계란 꺼내 먹다가 쏘인 것 아니냐?”는 등 벌에 쏘인 것을 나의 소행에 대한 업보로 여겨 꼬치꼬치 따져 물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는 밥 얻어먹으러 온 거지에게 준 밥이 쉬었나 보다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행위에 그 업보를 합리화하려 들곤 했다.

옛 조상들의 동물관은 해치면 어떤 형태로든지 공격과 보복을 받는다는 생명사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 집에 사람이 나고 죽고 시집가고 할 때 반드시 벌통에 먼저 찾아가 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과거에 급제하거나 송사(訟事)가 있을 때도 꼭 벌통에 고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였다.

사람이 죽으면 검은 보로 벌통을 덮어주어야 했고, 벌들도 알아서 꿀 따러 나가는 일을 삼간다고 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비 오는 날 산길을 갈 때에는 기어 나올 벌레를 밟아도 죽지 않게끔 느슨하게 삼은 짚신(五合鞋)을 신고 나가는 것이 법도였다. 이와 같이 조상들은 크고 작은 생명에 대한 배려로 짐승들의 분노나 보복을 살 일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흥부처럼 짐승으로부터 보은의 선과(善果)를 받았던 것이다.

수꿩은 한 산에 한 마리밖에 살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다처이긴 하지만 자신이 행세하는 영역 밖에 사는 남의 각시 꿩들을 넘보거나 추파를 던지는 법이 없다. 이렇게 남녀가 유별하다 하여 우리 조상들은 시어(詩語)에서 꿩을 덕조(德鳥)라 곧잘 읊었다.

만약 바람기 있는 암컷이 옆 산의 남의 서방 꿩에 추파를 던지는 일이 있으면 수놈끼리 피투성이의 결투를 벌인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두 마리 다 죽기까지 사생결단의 싸움을 한다. 결코 약세라 하여 도중에 도망치거나 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옛날 무신들이 머리에 꿩 깃을 꽂고 다닌 이유가 바로 사생결단하는 수꿩의 용기를 숭상하고 본뜨기 위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활동하고 지배하는 영역을 보호 사수하는 영역 감각이 대단한 속성도 무신이 꿩 깃을 꽂고 다니게 한 요인이라고 한다. 옛 병법에 보면 수꿩이 지배하는 영역 그대로를 요새화하면 난공불락이라 하여 치성(雉城)들을 많이 쌓고 있다. 그리고 꿩이 우리 한국인의 인상에 좋게 아로새겨진 데는 그 밖에 강인한 모성애 때문이기도 하다.

산불 속에서 제 새끼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면 새끼를 구하러 날아들어 함께 타 죽는다. 또 알을 품고 있는 중에 산불이 나면 불에 타 죽을지언정 날아가지 않는 게 꿩의 습성이다. 꿩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은한다는 얘기도 있다. 구렁이한테 감겨 죽어가고 있던 꿩을 살려준 한 서생에게 그 꿩이 죽음으로써 보은한 설화에서 치악산(稚岳山)이란 산 이름이 나왔다.

그런 후손들의 동물학대가 요즘 너무 심해 충격이다. 얼마 전 경주에서 꽃마차를 끌던 말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는 장면을 보고 몸서리를 친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길고양이 몇 천 마리를 포획하여 전국의 보신 건강원에 팔아넘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생명을 가진 동물만이 아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모두가 큰 눈으로 볼 때 다 진리의 자손이요, 한 기운으로 연계(連繫)된 한 권속(眷屬)이다. 살생을 업으로 한 사람도 가급적 그 생업을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 죽인 생령(生靈)들과 입장이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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