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장군 인터뷰]”나더러 ‘수구보수’라고 그래요. 난 뼛속까지 군인이요!”

민병돈 장군이 현역 중장 시절 입었던 예복, 정복, 전투복 및 삼정도와 군모를 배경으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사진=라훌 아이자즈 기자>


장병들 비밀투표 허용, 인사불이익···1987년 6월 계엄령 기도 저지

열여섯 6.25학도병서 육사교장 전역 “조국에 몸바칠 기회 감사”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민병돈(80·육사 15기) 예비역 중장이 자주하는 말이 있다. “난 장군이 아닙니다. 내가 장군이면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나는 뼛속까지 군인입니다.”

육사교장을 끝으로 1989년 예편한 민 장군은 6·25전쟁과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다. 인민군에 입대할 뻔하다 빠져 나온 것과 국군에 입대해 6개월간 전투한 것이다. 둘다 우리 나이로 16살 휘문중학교(6년제)에 다닐 때 일이다.

“6·25가 일어나고 얼마 있다가, 상급생들이 모이라고 해요. 그리고는 ‘자, 우리도 조국해방전선에 뛰어들 기회가 왔다. 모두 그 길로 가자’고 그럽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 청계국민학교에 집결할 예정이었어요. 평소 나를 아껴주시던 국어 선생님이 부르시더군요. 당시 휘문학교에서 좌익사상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메모지에다 뭔가를 써주시더니 심부름 다녀오라고 하는 겁니다. 나를 빼주기 위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 심부름 가는 척 하다가 탈출해 나올 수 있었지요.”

민 장군은 “해방 이후 중학교와 대학들에서는 좌우익이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고 했다. 16살 민병돈은 그해 11월 하순 이번엔 국군에 입대하게 된다. 당시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9·28 서울 수복 이후 북진하던 연합군이 다시 밀리던 때였다. “하루는 선배들이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아놓더니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다. 국군에 들어가 조국을 지켜야 한다. 지원할 사람들은 손을 들어라’고 해요. 주변을 보니 하나둘씩 손을 드는 겁니다. 물론 나도 같이 손을 들었지요. 얼마 후 파주 적성면 육군 제1사단 지역으로 가서 실탄 사격과 수류탄 투척 같은 간단한 훈련만 받고 전투에 나가게 됐어요. 당시엔 중학교에 교련시간이 있어서 제식훈련이나 총검술 등 기초 훈련을 해 우리같은 학생출신들은 훈련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어요.”

민병돈 학도병은 경기도 파주, 고양, 양주, 시흥, 수원 그리고 한강과 임진강에서 전투했다. 고양지역에서 적에게 포로가 된다. “나를 감시하던 적병도 내 또래예요. 그때가 1·4후퇴 지나고 1951년도 3월이었어요. 그 적병이 총을 들고 포로인 나를 인솔해 가는데 하늘에서 미군 비행기가 폭음을 내며 지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어린 적병이 길가 움푹 파인 곳으로 숨는 거예요. 이때다 싶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 달렸지요. 그때 산 능선에 있던 적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왼팔에 관통상을 입었어요. 유혈이 낭자했지요. 그렇게 해서 포로가 돼 끌려가다 탈주한 거죠.”

6·25 나던 해와 이듬해 민병돈은 당시 한반도에 살고 있던 대한민국 보통국민이 겪었을 일들을 일찌감치 치렀다. 기자는 6·25 한국전쟁과 관련해 그가 겪은 것 이상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1993년 여름 한겨레신문 국방부 출입기자와 예비역 장군으로 처음 만난 이후 기자는 민 장군한테서 전쟁사(戰爭史)에 관해 상당히 많은 얘기를 들어온 터였다.

장군님께선 누구보다 동서고금 전사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꿰뚫고 계시지요. 6·25와 관련된 얘기 몇 가지 들려주십시오.
“요즘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 무슨 관심이 있나요? 60년 훨씬 지난 일이지만, 몇 가지는 꼭 얘기하고 싶군요. 우선 미군과 중공군 얘기예요. 그들은 장군이나 그 아들들이 많이 참전했어요. 실제로 전쟁하다 실종되거나 전사하기도 했구요. 미 제8군 사령관 밴프리트 장군은 공군 조종사인 아들이 적에게 격추당하여 실종된 사실을 보고받고, 며칠간 수색 끝에 발견되지 않으니 수색을 중지시킨 일도 있어요. 그 당시 우리의 적이었던 중국 모택동 아들 모안영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것은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이니까 존경과 신뢰가 따르고 부하들도 목숨 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거죠.”

그는 “6·25때 한국전에서 미 육군 제21보병연대장 마틴 대령이 전사했고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며 “프랑스에선 2차대전 영웅 몽클라 중장이 스스로 중령으로 4계급 강등해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잘 싸워주었다”고 했다.

6·25당시 의료진을 보낸 인도의 경우 소령인가 하는 장교가 전사한 경우도 있다면서요?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인도 군의관 소령을 포함해 3명이 적군의 포격으로 전사하고 21명이 부상당한 일이 있었지요. 당시 한국은 정부수립이 채 2년도 안된 상태였는데도 많은 우방국가에서 전투병과 의료진이나 물자 등을 지원해 주었어요. 이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력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이 소련의 공산화 정책을 저지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은 운이 아주 좋았던 셈이죠. 전쟁이 발발하던 6월25일 고향에서 주말 휴가중이던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사실을 보고 받고는 크게 분노하여 ‘이놈들 당장 쫓아버리겠다’며 파병을 결정한 것도 우방국들의 참전에 큰 영향을 줬다고 봅니다.”

미주에선 미국을 포함해 캐나다와 콜럼비아, 남태평양에서는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아시아에선 태국, 터키가 군대를 보냈고, 멀리 아프리카에선 에티오피아와 남아공이,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스도 파병했다.

“모두 우리한테 은인이나 다름없는 나라들이지요. 고마운 마음을 늘 잊어선 안됩니다. 필리핀의 경우 1496명이 참전하여 112명이나 전사했지요. 지금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장충체육관이 있지요. 60, 70년대에 국제경기는 물론 대통령 취임식 같은 국가 중요행사를 거기서 다 치렀어요. 장충체육관이 바로 필리핀이 지어서 기증해준 겁니다. 인도만 해도 지금은 우리보다 경제력이 약하지만,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국가지요. 터키는 한 때 세계적인 강대국이었고, 지금도 우리와는 각별한 관계에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은혜를 잊고 사는 국민은 결코 국제사회의 인정은 물론 문화국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터뷰 모두에 전한 것처럼 민병돈 장군은 뼛속까지 군인이라고 본인은 물론 후배들도 인정한다. 베트남전 때의 일화 한토막이다.

“보병연대 작전주임으로 밤새워 작전을 통제한 후 피곤하여 잠시 쉴 곳을 찾아 누우려고 하는데 부하사병이 경례를 하는 겁니다. 순간 재빨리 자빠지듯 누웠지요. 그랬더니 ‘피용’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드는 겁니다. 나무 위의 적 저격병이 쏘았어요. 경례받는 걸 보고 내가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어지는 그의 베트남 시절 이야기다.

“베트남 참전기간 동안 베트남 군인들이나 국민들이 적군(베트콩) 최고사령관인 호치민에 대해 나쁜 얘기를 하는 걸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이 전쟁에서 베트남이 망하겠구나’라고. 몇 년 뒤 실제로 그렇게 전쟁은 끝났구요.”

민병돈 장군 하면 우리 사회 일각에선 ‘보수강경파’로 보는 시각이 많다. 만 22년간 수십 차례 그를 만나온 기자는 “그가 보수주의자는 맞지만 원칙론자이며 민주주의자로 때로는 진보쪽에 가까운 장군”이라고 주변에 소개한다.

몇가지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물론 민 장군의 입을 통해 들은 얘기를 당사자들로부터 확인한데 따른 기자의 결론이다.

먼저, 선거 때 군 부재자 투표와 관련한 그의 소신이다. “내가 처음 장교로 선거를 경험한 것은 1960년 소대장으로 3·15선거 때입니다. 당시 특무대(기무부대)에서 무조건 이승만·이기붕을 찍으라고 할 때죠. 나는 소대원들에게 너희들 마음대로 투표하라고 했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85년 2·12 총선때였어요. 당시 제20사단장으로 인근 수도기계화사단장이던 후배 김진영 장군더러 청평댐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선거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죠. 만나보니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어요. 선거때 실제로 자유투표에 맡겼어요. 우리 부대에서 야당 지지표가 많이 나왔지요. 그후 나는 좌천은 됐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육사교장 전역때 ‘지록위마(指鹿爲馬)’ 글 남겨
1987년 6월 전국에서 민주화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를 당시 그는 특전사령관직에 있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 및 군부 일각에선 위수령을 선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실제로도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었다.
“상부의 준비명령서가 내게 왔는데, 어느 날 몇 시에 특전사부대를 집결시키라는 겁니다. 지세히 보니 이건 위수령이 아니라 계엄령 선포예요. 동기인 고명승 보안사령관을 만나서 ‘나는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으니 자네가 뵙고 말씀드리게. 계엄을 선포하면 88올림픽을 치를 수 없을뿐더러 광주사태로 우리 군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는데, 절대 계엄은 불가하다고 말씀드리게. 그리고 누가 그러더냐고 하면 민병돈의 생각이라고 말씀드리게’라고 했어요. 그 해 말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되고 3김씨가 출마한 것은 알려진 대로이지요.”

그는 현역시절 공사(公私) 구분이 명확한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지휘관 시절, 공관에서 친지 등과 개인적인 용무로 식사할 경우 담당관을 불러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물은 뒤 개인돈을 지불했다고 한다. 서울 양천구 목동 단독주택에서 43년째 살고 있는 민 장군은 “나는 다시 태어나도 군인을 할 겁니다. 이 숭고한 소명을 주신 국가와 조상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One comment

  1. 민장군님의 아들놈과 함께 잠깐 군 생활을 했는데. 현역 장군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현역 사병이였고 가끔 손 편지를 보냈는데 강건함과 아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임을 느꼈는데. 그 당시 육사교장 시절로 기억함. 참 군인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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