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팔선생의 고금인생] 미국부자 vs 한국부자, 무엇이 다른가

강도처럼 벌어 귀족처럼 쓴다…‘사회적 책무’ 충실 이행

[아시아엔=김중겸 이실학회 창립회장] 작년 12월 우리 사회는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은 ‘수퍼갑’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멀기만 한 일인가? 막스 베버의 기독교윤리와 자본주의를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미국의 부호들은 비교적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미국 역사상 강도짓으로 부자가 된 이른바 ‘Robber Baron’(강도부자)도 30명 가량이나 된다. 상상을 초월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 한참 전쟁 중인 군대에 낡고 녹슨 총을 판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만년에는 평생 번 돈을 자선사업과 사회에 기부했다.

김중겸사진2

철강왕으로 알려진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1835~1919)는 평소 몹시 인색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노동자 임금을 깎아댔다. 무능한 공장 사람에게 더 줄 이유가 없다며 차라리 나라 전체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지론이었다. 철강사업 확장 과정에서는 동업자를 속이기도 했다. 정부에 납품한 군대용 철강에는 불량품을 섞어 넣었다. 많은 이익을 챙기는 강도부자 수법 중 하나였다. 사기 치고 협박해서 인수합병도 했다. 욕먹을 일은 회사 임원이 대신 하도록 했다.

문화예술전당 ‘카네기홀’ 건립 기부
그런 사건 가운데 하나가 홈스테드 제강소(Homestead Works) 학살이다. 1892년 4월 카네기는 공장장 헨리 프릭에게 노동조합 처리지침을 줬다. 철강노조 소속이 아닌 노동자만 고용한다고 못 박았다. 비노조원은 말을 잘 들으니 임금 삭감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두 달 후 임금인상을 둘러싼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카네기는 곧바로 고향 영국 스코틀랜드 별장으로 몸을 피했다. 공장장 프릭은 날림공사로 댐을 무너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주민이 물에 떠내려갔다. 이런 자가 노조문제를 다뤘다. 핑커톤 경비회사에 노조 분쇄용역을 맡겼다. 용역 경비원 3백명이 투입돼 노동자 14명이 숨지고 163명이 중상을 입었다. 핑커톤 직원 40여명도 불구가 되다시피 다쳤다.

그러나 이처럼 비겁하고 야비한 강도부자였던 카네기는 생애 후반에 번 돈 대부분을 교육과 문화사업에 기부했다. 카네기홀은 지금도 문화예술의 전당으로 미국민은 물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도서관도 여기저기 지었다. 미국사회는 그에게 비난 대신 찬사를 보냈다.

김중겸사진3
‘정격유착’으로 회사 키워…시카고대 설립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1839~1937))는 어땠나? 그의 아버지 윌리엄은 너무 경박하여 의지하고 기댈 사람이 못됐다. 돌팔이 의사인 그는 어린 소녀를 강간하고 걸핏하면 집을 나가 몇 달 지나 돌아오곤 했다. 아들 존은 아버지와는 다른 길 걸었다. 다행히 부자관계는 좋아 아버지 윌리엄은 아들 존에게 사업밑천을 빌려줬다. 원금 1000달러에 이자는 10%. “3년간 제 날짜에 이자를 내라. 그러면 그 돈을 선물로 주마.” 아들은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며 십일조를 현금으로 평생 꼬박꼬박 냈다. 주일학교 5센트, 빈민구제에 10센트, 해외선교에 10센트를 매주 헌금했다. 소액 기부자 모임에도 매주 75센트를 기부했다.

그러나 아들 존 록펠러는 무자비한 인수, 문어발식 확장, 정경유착으로 자신의 석유회사를 키워 나갔다. 강도부자의 전형이었다. 결코 줄어들지 않는 재산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도 거지를 보면 외면했다. 인수방법은 간단하고 무자비했다.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와 의회 관계자를 매수해 남부개발회사(South Improvement Company) 설립특허를 받았다. 이 회사를 내세워 주요 3개 철도회사와 석유운송 계약을 체결했다. 록펠러는 자기 회사의 운임은 할인받고 경쟁정유회사는 터무니없이 비싼 운송료를 받게 만들었다. 경쟁사는 얼마 안돼 적자를 보고 두 손을 들었다. 록펠러는 헐값에 매수했다. 중소 정유업자의 시체 위에 세운 석유왕국이다. 록펠러를 교수형에 처하고 화형하는 집회가 연이어 벌어졌다. 하지만 그는 1937년 97세로 사망할 때까지 만년엔 자선사업에 몰두하여 시카고대학교을 설립하고, 록펠러재단을 세워 병원·의학 연구소·교회·학교 등의 문화사업에 전념했다.

김중겸사진4
‘손에 피 묻히는 사업’으로 떼돈…도서관 설립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1763~1848)는 독일에서 푸줏간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민, 뉴욕에 정착했다. 모피상 일꾼으로 일하면서 모피 교역에 눈 떴다. 직접 수집에 나섰다. 인디언 상대의 거래였다. 손에 피 묻히는 장사였다. 동물을 잡아 좋은 털을 얻으려고 산채로 벗긴다. 제 정신으론 못 한다. 남들이 외면해도 그는 굳건히 해냈다. 털이 다 마르면 담배와 싸구려 옷이나 장신구를 건넸다. 사향 쥐나 수달 또는 비버 털을 받아왔다. 얼마 후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인디언을 술에 취하게 만들어 강탈하다시피 모피를 가져왔다.

원가 0.5센트 짜리 저질 알코올을 직접 주조해 병당 50센트에 인디언에게 팔았다. 마시고 죽기도 하는 유독성 술이었다. 이걸 마신 인디언은 인사불성이 돼 모피를 거저 주다시피 했다. 이렇게 수집한 모피를 중국에도 팔면서 아편장사까지 했다. 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19세기 초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뉴욕에서 땅을 사들였다. 구입이라기보다는 강탈이거나 편취였다. 뉴욕 여기저기에서 보게 되는 왈도르프는 그의 고향 독일의 시골 마을 이름이다. 그의 소유에 고향 이름을 붙였다. 사망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던 그는 뉴욕시에 공립도서관인 ‘애스터도서관’의 설립을 위해 40만달러를 유증했다. 이 도서관은 1895년 다른 도서관들과 통합되어 뉴욕공립도서관이 됐다.

강도같이 벌어 귀족처럼 쓴다? 만년에 돈 몽땅 잃고 비참하게 산 이도 적지 않다. 자선과 기부로 돌아선 사람의 경우도 부의 소유 못지않게 가정엔 각종 불행이 잇따르기도 했다. 철도왕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의 큰 아들은 간질환자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남의 재산 강탈행위에 절망해 병은 갈수록 깊어갔다. 밴더빌트는 대신 둘째 아들에게 집안의 앞날을 기대했다. 아버지를 빼닮았다. 소유 증식 면에서는 교활하기가 아버지를 뺨 쳤다. 그러나 일찍 죽고 말았다. 1만3500평에 이르는 가족묘원에 묻혔다. 사람들 원한을 얼마나 샀는지 시체를 파내겠다는 소문이 나돌아 경비원을 고용해야 했다. 15분마다 순찰하도록 했다.

애스터의 큰 아들은 정신지체 장애자였다. 천형(天刑)이었다. 집과 요양소를 왕래하는 생활을 했다. 애스터 자신도 큰 병 을 얻었다. 인간의 젖 즉 모유만 먹어야 하는 위장병에 걸렸다. 록펠러도 모유 외에는 소화능력이 없는 병으로 고생했다. 99세에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식사를 위해 유모를 두어야 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