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길을 묻다](3) “자네야말로 해동제일의 문장일세”

[아시아엔=안동일 칼럼니스트] 며칠 전 과천 주암동에 있는 추사 박물관에 갔다가 그곳 방명록에서 가슴을 치는 멋진 글귀를 발견했다.

“스물엔 세상을 바꾸려 돌을 들었고/ 서른엔 아내를 바꾸려 눈꼬리를 들었고/ 마흔엔 애들을 바꾸려 매를 들었네/ 내 나이 쉰, 이제 알았네 바뀌어야 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이젠 붓을 들려하네.”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두 세기 전 이 땅에 와서 파란만장한 칠십수를 누리고 떠난 추사. 그의 족적은 남긴 무수한 유묵과 일화, 그리고 폐부를 찌르는 촌철의 가르침으로 오늘도 세상을 풍미하고 있어 또 한 사람 지명(知命)의 추사매니아를 만들었던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하늘과 인간의 도리를 연구하여 백가의 꽃다운 윤기를 머금었고 필법은 천지조화에 참여하여 왕희지 왕헌지 필법을 능가했으며 시문에 뛰어나 세월의 영화를 휩쓸고 금석에서는 작은 것과 큰 것을 모두 규명하여 중국에 까지 이름을 떨치셨나이다. 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그대는 마치 폭우와 우레같이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면 그대는 봄바람과 따스한 햇볕과 같았습니다.”

함풍 8년 무오 2월 청명일에 술 한잔 올리며 김공 완당선생의 영전에 고했다는 평생 지우 초의선사 제문이다.

추사 생전 예도의 구극은 서예였고 회화의 윗길은 문인화였다. 추사는 서화불분론이라 하여 글씨와 그림이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지만. 추사의 글씨에 대해 평한 수작의 하나.

“글자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추사의 글씨만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이름 하지 않았나 싶다.

세상사는 만남과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과의 만남 사물과의 만남 그리고 사건과의 만남.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만남 속에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의 평가가 바로 인생의 성패 인지도 모른다.

필자를 포함해 많은 세인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또 선택을 앞두고 망설이곤 하지만 추사는 그렇지 않았다. 준비하는 자세로 만남을 만들어 냈고 또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올곧게 밀고 나갔던 것이다.

젊은 시절 추사의 연경행과 곳에서의 담계 옹방강(翁方綱)과의 만남이야말로 오늘의 추사가 있게 한 결정적인 선택이었다. 그 선택을 위해 추사는 능동적으로 준비했다. 사실 추사의 당시 연경행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자제군관제도는 신진기예들인 사신 자제들의 견문을 넓혀 준다는 좋은 제도였는데 추사가 백부에게 양자로 들어갔기에 자격을 주지 않으려 했을 때 꽤나 끌탕을 했던 모양이다. 추사는 백방으로 뛰었다. 그의 재주를 아는 지인 선배들이 적극 나섰고 다행히 동생이나 조카를 자제군관으로 들인 전례가 있었기에 어렵사리 연행에 동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별한 임무가 없는 자제 군관이었기에 연경에서의 활동은 퍽이나 자유로웠다. 추사는 연경의 서점가 유리창의 서국을 자주 찾았고 거기서 청국의 한다하는 청년 유생들을 만났다. 그들 역시 재사 추사를 환대해 주었다. 하지만 귀국날짜가 다 되도록 큰 소망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담계 선생을 만나는 일이었다. 연경에 가게 되면서 가장 들떴고 기대했던 일이 바로 이 일이었는데 말이다.

당시 담계는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사람들을 잘 만나주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 이국에서 온 무명의 젊은이를 만나주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몇번 연을 동원해 서찰을 보내 내방을 타진했지만 무소식이었다. 추사는 초조해졌다. 언제 다시 연경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다시 온다 해도 담계가 살아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추사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소망은 극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그날도 추사는 담계와 마주칠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를 갖고 새벽 댓바람부터 법원사를 찾았다. 벌써 닷새째 계속되는 일이었다. 법원사는 연원 있는 연경 최대의 사찰. 석묵서루(石墨書樓)라 불리우는 담계의 저택이 법원사 인근이었는데 그가 간혹 법원사 아침 예불에 참여도 하고 경내를 산책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마침내 담계와 조우하게 되는데 묘하게도 추사가 법원사 후원에 있는 고려조 나옹 화상의 부도비를 베끼고 있을 때 맞닥뜨렸다. 옹방강은 무수한 제발(題跋)과 비첩(碑帖)을 고증한 청조 법첩학계의 최고봉. 군관복을 입은 이국 젊은 청년이 비첩에 관심 갖는 것이 노학자에게는 어여삐 보였을 터였다. 몇 마디 필담을 나눠본 뒤 이내 그의 재주와 학문을 높이 샀고 그 길로 자신의 서재로 가자고 초대했던 것이다. 어쩌면 추사가 그리 끌탕을 하지 않았어도 그날쯤 담계가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담계도 추사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아무튼 일이 되려고 했는지 두 사람의 인연이 돈독했는지 나누는 대화마다 추사는 담계의 고개를 주억거리게 했고 “자네야말로 해동 제일의 문장일세”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

“자네야말로 해동제일의 문장일세”

그날의 필담록을 보면 불교경전인 <유마경>에서부터 소동파에 대한 소회까지 다양한 주제가 오갔는데 아무래도 추사가 준비를 단단히 했던지 조선의 비첩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해동군자 이야기도 최치원의 비첩을 얘기하면서 나온 말인 듯하다.

이날의 만남과 대화는 추사의 일생을 관통하는 최대의 사건이기에 자세한 내용과 일화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한다. 아무튼 그날 첫 만남에 추사를 자신의 제자로 거두기로 마음을 굳힌 담계는 통넓게도 자신의 후배이지만 라이벌이었던 완대 완원에게도 추사를 소개한다. 아들 옹수곤을 시켜 다음날 추사를 완대에게 안내토록 했던 것이다.

그때 추사의 운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완대는 원래 남방의 지방 관료로 파견 나가 있었는데 마침 연경에 들어와 처가에 머물고 있었다. 완대와의 만남에서도 추사는 자신의 학문과 재주를 맘껏 뽐내 단박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연스레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이 두 스승과의 짦은 만남은 추사의 일생을 규정한 일대 사건이었다.

후일 추사는 지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람의 인생은 만남과 선택의 연속인데 중요한 만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다가오는데 그 만남을 선택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준비에 달려 있다고 했다.

우리는 어떤 만남을 기대하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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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comment

  1. 젊어서의 성취와 명성보다는 나이들어서의 원숙한 경지가 더 풍요로운 일이겠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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