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8일] 레이거 노믹스 주역 백악관 떠난 날

2009년 가자 전쟁 휴전

2009년 1월18일 포성이 멎지 않던 가자 지구가 조용해졌다. 이른 바 ‘가자 전쟁(Gaza War)’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날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한다. 그로부터 약 12시간 뒤 하마스 측에서 1주일간의 휴전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전쟁이 종결된다.

싸움의 발단은 하마스 쪽이었다. 하마스가 휴전을 어기고 로켓 공격을 계속함에 따라 이스라엘이 2008년 12월 27일 오전 11시 30분 가자 지구 공습을 시작한다. 22일 동안 엄청난 공습이 진행됐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제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응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국제법은 “적대 상대방은 서로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분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 공격 목표가 합법적으로 적절한 군사 시설이라고 확증돼야 한다. 공격 목표도 시민들을 가능한 고통스럽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보증돼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런 국제법상 조항들을 거의 완벽하게 어겼다고 국제사회는 판단했다.

2008년 12월 27일 유엔 인권이사회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 인권 상황 특별 기록관 리처드 팔크(Richard Falk)는 가자 전쟁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군은 유엔 학교와 유엔 구호트럭을 공격했다. 구호트럭은 피격 당시 구호활동 중이었으며 유엔마크와 깃발이 달려 있었다. 또 그 시각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정한 임시휴전시간(3시간)이었다. 이 때문에 유엔은 구호활동 중단을 선언했고, 이스라엘 군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팔크는 “(이스라엘군의 공중 공격은) 심각하고 거대한 국제적인 인권에 대한 범죄”라고 비판했다. 리처드 팔크는 전쟁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이스라엘 지도부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의 공판을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2009년 1월8일 국회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휴전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에는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무력 충돌에 대한 깊은 우려와 관련 당사자들 간의 휴전을 촉구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1989 레이건 미 대통령 퇴임인사

미국 제40대와 41대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이 1989년 1월18일 백악관 참모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백악관 참모들은 고향 캘리포니아로 떠나게 될 레이건 부부에게 ‘석별의 노래’를 불러 줬다.

레이건은 69살이라는 미국 역사상 최고령의 나이에 백악관 주인이 됐다. 1981년 3월 워싱턴에서 한 청년이 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을 위기까지 처했다.?레이건은 퇴임한 지 5년이 지난 1994년 11월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뒤 투병해오다 2004년 6월 5일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재임 당시 경제정책으로, 세출을 줄이고 큰 폭의 소득세 감세, 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의 완화 등을 뼈대로 한 ‘레이거 노믹스’는 신보수주의나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경제정책으로 유명해졌다.

‘레이거 노믹스’는 당시 미국의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인플레이션)을 치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급 측면(조세, 고용, 자본)’을 자극, 파급효과가 수요 증대로 미치게 한다는 ‘공급 경제학’을 내세웠다. 그러나 군산복합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군사적 패권을 떨치던 ‘팍스 아메리카’ 군사외교정책의 영향으로 군수산업 중심의 경기회복 효과는 있었으나, 재정지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이후 재정적자에 무역적자까지 가세해 이른 바 ‘쌍둥이 적자’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1974년 이집트-이스라엘 국경격리협정

1974년 1월18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됐다.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난 것이다. 협정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UN군이 파견됐다.

UN안보리는 앞서 1967년 6월6일 정전을 결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쌍방이 수락하면서 마침내 6월9일 ‘제3차 중동전쟁’의 정전이 실현됐다. 그러나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격화했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도 있었다. 1970년 9월28일 대통령 나세르가 갑자기 서거한다.

후임 M.A.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 1973년 10월6일 선제공격을 가했다. 제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했다. 하지만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 전선은 고착화됐다. UN안보리는 10월22일 미 ·소공동제안에 따른 즉시 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같은 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정전을 성립시켰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18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된다. 제대로 이행하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군이 파견됐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금수(禁輸)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다. 각국 경제는 불안한 중동의 볼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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