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두 팔이 없는 피아니스트 ‘류웨이’

류웨이(??)는 지난 2010년 제 1회 중국 달인(達人)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25살의 젊은이다. 그는 두 팔이 없는 피아니스트로 통한다. 그가 두 발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자서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축복(活着已?得祝福 )>이라는 책이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불굴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자.

류웨이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10살 때 불의의 큰 사고를 입어 두 팔을 잃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위대한’ 어머니가 늘 지키고 있었다. 궁핍한 생활과 두 팔을 잃은 아들이 오히려 그녀에게 내구력을 길러 주었다. 아들에게 먹고 마시고 글자를 쓰는 것과 같은 손으로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본인이 발로 직접하도록 다그쳤다. 이런 어머니를 류웨이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12살 때 수영을 배웠고 2년 후에 전국 장애인 수영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16살에 타자를 배웠다. 19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일 년 후 7급 피아노 자격시험에 통과하였다. 22세에, 1분에 233 글자를 입력하여 세계에서 두 발로 가장 빨리 글자를 입력하는 인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23세 때에는 중국 최고의 달인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온 그의 삶은 만인들의 사표가 되고도 남는다.

현대인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다들 무엇인가에 쫓기는 기분이다. 돈에 쫓기고, 빚에 쫓기며, 아파트에 쫓긴다. 학위에 쫓기고 승진에 쫓기며 명예에 쫓긴다. 도시 한복판에 고급 아파트를 두 세 채씩 가지고도 불안해서 벌벌 떤다. 노후 준비가 안됐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병든 ‘하우스 푸어(house poor)’인 것이다. 도무지 욕심의 끈을 놓을 줄 모른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병도 생기고 지혜도 고갈돼 아둔해진다. 간혹 대기업 이사나 명문대 교수가 사소한 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아마 분수를 잃은 욕심이 죄를 잉태한 것 같다.

‘득롱망촉(得?望蜀)’이란 고사가 있다.《후한서(後漢書)》 광무기(光武紀)에서 유래된 말이다. ‘농 땅을 취하니 촉 땅이 탐이 난다’는 내용으로, 사람의 욕심이 한도 끝도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뤄양(洛陽)을 도읍으로 한을 재건했을 무렵의 일이다. 한을 재건한 광무제는 주위 할거 세력들을 모두 토벌하고 간쑤성 농서의 외효(??), 쓰촨성 촉의 공손술(公孫述) 두 세력만 아직 복속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세력이 약한 외효는 광무제와 공손술 간에 양다리 외교로 명맥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외효가 죽자 그 아들이 광무제에게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농서도 후한의 손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촉 땅만 남았다.

이때 광무제가 “사람은 본디 만족할 줄 모르는가 보다. 이미 농 땅을 평정했는데 다시 촉 땅을 바라는구나. 매번 군대를 출동시킬 때마다 그로 인해 머리가 세어진다(人固不知足 旣平?復望蜀? 每一發兵 頭髮爲白)”?라고 했다.

주변을 돌아보면 욕심 없이 그저 소박한 꿈을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산소통에 붙은 고무호스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팔순의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이 산소통을 집 뜰에 놔두고 이 통에 연결된 고무호스에 달린 산소호흡기를 코에 꿰고 밭일도 하고 산보도 한다. 이 할아버지의 행동 반경은 매우 좁다. 산소통에 연결된 고무호스 길이만큼 겨우 움직일 수 있다. 산보거리도 고작해야 몇 백 미터다. 이 할아버지의 소원은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산소 호흡기를 떼고 죽기 전에 시내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다.

경기도 안성의 한 물가에서 만난 50대 후반의 한 상인은 당뇨병 등으로 시력을 잃어 거의 실명에 가깝다. 희미하게 윤곽만 보일 뿐이다. 그는 호소한다. “장사꾼이 하루 하루 돈 벌어서 돈 세는 재미가 쏠쏠한 법인데 도대체 돈이 보이지 않으니 재미가 없다”고 낙담한다. 그는 물가에 앉아 감각으로 낚시를 하면서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는 것이 그의 꿈이다.

요즘 개그 콘서트에 ‘감사합니다’ 코너가 인기를 끌고 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친구와 같이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마지막 한 개가 남았는데 친구가 먹었습니다. 알고 보니 대 파여서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면서도 더 갖지 못해 탄식하는 현대인을 풍자한 것이다. 사소한 일에 낙담하지 말고 건강한 것 자체만으로 무한한 축복임을 알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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