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신달자 시인이 눈물 훔친 이유

중소기업 사장이 “내 힘들다!” 외치자 사원들 “다들 힘내!” 화답

각종 모임에 술이 한 순배 돌기 전 어김없이 모두 잔을 높이 들고 건배사(乾杯辭)를 외친다. 술잔이 오가며 등장하는 마법의 주문이 바로 건배사다. 건배사는 사람 간 장벽을 순식간에 허물기도 하고, 때에 따라선 되레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말처럼 건배사는 짧고 멋진 말이면 더 좋다.

건배사는 자기를 알릴 수 있고 모임에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건배사도 하나의 스피치이므로 철저한 준비가 필수적이다. 건배사는 시간, 장소, 여건에 적합해야 하므로 모임의 성격, 참석자 등을 고려하여 미리 준비해 두면 좋다.

건배사 문구도 다양하다. 대개 들어 본 건배사는 이런 것이다.

남행열차 :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세대 리더가 되자
어머나 : 어디든 머문 곳에는 나만의 발자취를(추억을) 남기자
주전자 : 주인답게 살고, 전문성을 갖추고 살고, 자신감을 갖고 살자
마무리 : 마음먹은 대로 무슨 일이든 이루자
고사리 :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해합니다.
껄껄껄 : 좀 더 사랑할껄, 좀 더 즐길껄, 좀 더 베풀껄
아리랑 : 아름다운 이 순간 서로 사랑합시다.
가감승제 : 기쁨은! 더하고!/ 슬픔은! 빼고!/ 사랑은! 곱하고!/ 우정은! 나누자!

건배사는 특별한 규칙이나 유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임 상황에 어울리는 코멘트로, 스토리를 가지고 재치와 감동까지 갖추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건배사가 중요해진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건배 제의를 받는 사람에겐 보통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짧고 간단한 이야기로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나를 돋보이게 하면서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하니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도 있다.

건배사는 ‘세상에서 가장 짧고 열정적인 폭발력을 가진 말하기’다. 1분 이내에 임팩트 있게 말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건배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모임에서 최고의 분위기 메이커가 될 수 있다.

여기 “내! 힘들다”로 건배 제의하는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이 있다. 신달자 시인(1943년~)이 이 회사에 강연을 하고 감상을 들려준 얘기다.

[전화기 너머로 강연부탁 하는 목소리에 미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강의료를 많이 드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부터 먼저 했다. 그래도 직원들에게 새해 보너스로 내 강의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잘나가는 회사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서 꼭 강의를 해줘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직원들에겐 새해 보너스라는 데 마음이 쏠렸고 가고 싶어졌다.

돈이 없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직원들에게 강의를 듣게 하려는 사장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가보니 직원들이 부부동반으로 앉아 있었다. 하긴 보너스는 아내에게로 가야 하는 게 요즘 세태다. 현금이 아니니 아내들도 엄연히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분위기에 맞게 이야기를 골랐다. ‘어떤 고통에서도 일어선다’는 주제였다. 바닥엔 좌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보다 더 큰 바닥의 힘이 숨어있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서로의 손을 뜨겁게 잡고 지금 더 사랑하라고도 했다. 열기가 달아올랐고 더러 우는 사람도 있었다. 강의를 끝냈더니 회사측이 국수를 먹고 가라고 했다. 성찬이 아니라 국수라는 말에 끌려 저녁도 함께 먹었다. 아내들은 전을 굽고 돼지고기를 삶았다. 눈물겨운 성찬이었다.

숟가락을 들기 전 회사 대표가 건배를 제의했다. 직원들과 함께 나도 소주잔을 들었다. 사장님이 “내, 힘들다!”라고 소리쳤다. 그 말을 직원과 그들의 아내 70여명이 합창하듯 받았다. “다들 힘내!” 그때 알았다.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가 된다는 것을. 울컥했다. 이번에 모두 함께 “다들 힘내!”를 외쳤다.

이만하면 될 것 같다. 저 힘으로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저 눈물의 힘을 합치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들이 6개월치 월급을 미루었던 인내 끝에 회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모든 직원이 사장의 마음으로,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다는 후문을 들었다. 이것이 한국인의 의지며 한국인의 힘이었다. 그날 내가 받은 강의료는 ‘감동’이었다. 그 강의료는 내 마음속에서 해가 갈수록 이자가 크게 붙는다.]

“내, 힘들다!” “다들 힘내!” 멋진 건배사가 아닌가? 이렇게 감동을 주는 건배사는 죽어가는 회사도 살려내고, 기울어가는 나라도 회생시키는 힘이 있다. 세월호참사가 터진지도 100일이 넘었다. 참사의 원흉이라고 지목받던 유병언도 의문의 주검으로 나타났다. 오리무중이던 그의 큰 아들 유대균도 체포되었다.

총체적인 부실과 부정으로 나라가 기울어간다고 대통령까지 눈물을 흘리며 국가개조를 악속했건만 아직 개조는커녕 ‘세월호특별법’마저도 여야의 힘겨루기로 실종된 형편이다. 이제는 세월호참사는 일종의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며 특별대우는 곤란하다고 소리친다. 시종이 여일(始終如一)하지 못하다. 뭐 보고 나오니까 이젠 급할 것이 없는가 보다. 신의를 져버리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야말로 승객보다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보다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다시 한번 온 국민이 “내, 힘들다!” “다들 힘내!”하고 국가혁신의 건배사를 외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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