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벌써 14년을 맞이한다는 생각을 하니 전혀 믿기지 않는다.
14년이란 긴시간 나는 그와 함께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즐겨하던 내 작업을 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했다면 내 머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하루하루 그 무게를 더한 많은 구상들이 잘 다듬어져 이 세상에 적어도 몇 개는 나와있지 않을까.
“데니스가 네 인생을 빼았아 갔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지나간 시간 어느 날엔가 그 아이를 버렸으니까.”
윤회를 믿는 어떤 선배의 내 짜증을 달래던 조언이었다.
그가 세살 나던 해, 난 그의 보드랍고 따뜻한 손을 꼭 잡고 균형이 잡히지 않고 뒤뚱거리는 그의 걸음마에 내 발자국을 맞추며 그가 살고 있던 곳에서 멀지 않던 비버리힐을 산책할 때 느꼈던 그의 체온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내가 특별히 사랑했던 아우의 첫 자식 데니스.
나는 늘 데니스의 문제가 내 머리 속에 자리를 잡고 있긴 하였으나 내 자신의 문제가 너무 많아 내 아우의 가슴앓이를 위로조차 해줄 수가 없었다. 그 후 십수년이 흘렀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난 할 수 없이 데니스를 끌어안고 살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나의 일상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나만을 위해 치달았던 내 생활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데니스는 내가 나누어주는 사랑 한줌으로는 항상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던지 어느새 다른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야 할 사랑을 혼자서 송두리째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언어는 항상 어눌하고 단순하며 나와의 소통방법을 알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며 완력을 쓸만큼 몸이 튼튼하지도 않다.
그와 같이 살면서 헌신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내 이름 석자를 장식해주는 분에 넘치는 인사를 받게 되었고 데니스 덕에 노환으로 고생하시던 부모님을 병원에서 모셔와 오서산 자락의 버려져 있던 우리 옛집에 모실 수 있는 복을 얻었었다.
이 아이가 내 옆에 없었다면 난 항상 불평이 많은 사람이요, 감사를 잘 모르고 늙어가는, 철 없이 몸만 늙은 노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4시간 같이 살면서 내가 밥을 지으면 그는 설거지를 하고 내가 비를 들어 먼지를 쓸어 내면 그는 물걸레질을 한다.
그가 그릴 그림에 쓰려고 찍어 놓은 사진을 프린트해주면 그는 그것을 가지고 데생을 하고 그 데생은 캔버스에 옮겨진다.
나는 그의 캔버스를 골라 밑칠을 해주는 조력자, 즉 조수이고 동시에 그가 해결 못하는 부분을 손질해 주는 선생이다.
한번 입력된 것은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뇌의 시스템을 가진, 어찌 보면 데니스는 오토매틱 시스템형 사람이다.
나는 데니스를 화가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이 아이를 지켜야 하는 나의 수고를 좀 덜어보려고 쥐어준 마커(색깔 싸인펜), 그는 그것을 가지고 마구잡이로 쉴 사이 없이 그려대었다.
지치지 않고 그려대던 그의 그림을 보고 전시를 해보자는 홍성사 사장님의 권유와 이재철 목사님 내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0년 전 인사동 휘쉬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그후 10년 데니스는 화가라는 직업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파리의 유네스코전시와 지난 4월 뉴욕 UN전시를 거듭하면서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남은 여생을 좀 안락하게 살아보려는 마음을 접게해 준 내 아이. 이 땅에 또다른 데니스를 맞이하여 그들과 놀아주는 아뜰리에 테라피를 꿈꾸게 만들어준 데니스. 그는 진정한 내 인생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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