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훈의 콘텐츠형인간] 中관광객, ‘용산 전쟁기념관’서 마주친 것은…

전쟁유적과 문화콘텐츠

지난해 프랑스 북부의 페론에 있는 <1차대전역사관>을 찾았던 적이 있다. 전쟁유산과 관련된 프랑스의 관광정책을 다루는 연구의 일환이었다. <1차대전역사관>은 1992년 문을 열었고 1차 대전의 가장 격렬한 격전지였던 프랑스 북부지방을 찾는 영국과 독일의 자생적인 관광객들을 수용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에 첨단 전시 기법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 역사관은 매우 독특한 면을 갖고 있다.

1차대전역사관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시 군인들의 전투복과 전투장비가 바닥에 움푹 팬 곳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전쟁 관련 시설에 전시된 군인 모형들은 우뚝 서서 용맹하고 결의에 넘치는 표정으로 전진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페론의 모형군인들은 바닥에 놓여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1차 대전 때 사용되었던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기관총, 수류탄, 박격포 등인데, 이것 역시 진열대위에 위용 있게 전시된 것이 아니라 바닥에 허리높이 보다 낮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런 독특한 전시실 구성에 대한 나의 의문은 <1차대전역사관>의 관장인 프랑수아 베르제씨의 대답을 통해 풀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배치는 <1차대전역사관>이 “전쟁박물관도 아니고 추모시설도 아니며 국가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나 국제적인 시각에서 1차 대전에 접근한다”는 설립당시의 목표에 충실한 결과라고 한다.

따라서 이 역사관은 전쟁에 대한 애국적이거나 영웅적인 관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대신, 당시 이 지역에서 충돌했던 프랑스, 영국, 독일이라는 세 나라의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전시장의 모든 주제에 대해 아래위로 나란히 3개의 전시대가 있으며 여기서 세 나라의 상황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가령 전쟁나간 아들을 기리는 프랑스인 어머니의 편지 아래로 똑같이 아들을 그리워하는 독일 어머니의 사진과 영국 아버지에 대한 신문기사가 나란히 제시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군과 적군이 없고,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페론의 <1차대전역사관>은 이 지역의 전쟁유적을 찾는 영국과 독일인 관광객을 주요 관객층 중의 하나로 상정하고 있는 만큼 프랑스적인 시각만 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이런 구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용산전쟁기념관을 떠올려보자. 전쟁기념관에 가면 한국전쟁의 중공군 참전과 관련한 전시장 앞에서 내용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중국인 단체관광객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 단지 우리 군대가 그들의 군대를 얼마나 용맹하게 무찌르고 격퇴하였는지 강조하는 것이 최선일까? 중국도 만주에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을 세워서 그들이 얼마나 열렬하게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우며 한반도 북쪽을 지켰는지 선전하고 있다. 이것이 전쟁문화유산의 바람직한 혹은 충분한 활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랑스 <1차대전역사관>의 예는 지난 세기의 전쟁유산이 21세기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전쟁과 관련된 콘텐츠는 무엇보다도 전쟁 그 자체가 불행한 사건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때 적이었던 나라의 국민들에게도 우리가 과거에 불행한 사건에 공통적으로 휘말린 적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기능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불행한 시대의 피해자였으며 그러한 상처를 여전히 공유하고 있음을 느낄 때, 미래로 함께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서적 결속력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쟁기념관도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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