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나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직업이 내게 끊임없이 들이밀던 송곳이다. 창의성에 대한 수없이 많은 주장들과 방법들을 물고 늘어져 탐색한 후에 ‘교육’으로
Author: 최진석
[최진석 칼럼] 용기란?…’세상과의 불화를 자초하는 것’
철학자들은 오묘한 어둠 속에서 홀로 밝은 빛을 본 사람들이고 홀로 조화로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다. 홀로 조화로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다 독립적 주체다. 그리고 그 독립적
[최진석 칼럼] 모옌과 하루키의 ‘삶의 승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이 문구를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사람’에서 읽는다. ‘걷는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다음’을 향한 기울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그저
[최진석 칼럼] 타조 잡는 법과 인문적 통찰
펭귄과 더불어서 날지 못하는 대표적인 조류, 날지 않고 의연함을 유지하는 새. 뇌의 크기가 눈의 크기보다 작은 새. 이런 타조는 어떻게 잡을까? 타조 사냥을 직접 해본
최진석 교수의 ‘사부모곡’思父母曲…”가슴 찢어지도록 감사합니다”
“배운 사람이 그러면 쓴다냐?” 책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시에 입 맞추고 싶어 하는 영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는 열린 문을 찾기보다 닫힌 문을
[최진석 칼럼] 철학이란 무엇인가?
판 자체를 새롭게 벌이려는 시도,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적인 시선은 분명 세상을 바꾸는 힘을 제공한다. 세상 속의 잡다한 변화를 마치 수학자가 ‘수’를 가지고 압축해서 포착해버리듯 철학자는
[최진석 칼럼] “관념에 갇히면 보지 않고 판단한다”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 정도면 우선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게 넘기기 싫다. 카뮈는 다니엘 디포의 문장을 제사(題詞)로 끌고 와 자신의 작품을 규정한다.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최진석 칼럼] ‘잔소리’에 대하여
백성을 못 믿는 통치자, 관객을 못 믿는 감독 동아시아 통치의 전통적 지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현대의 정치적 평화와 그 효과를 위한 영감을 구하기 위해 고대
[최진석 칼럼] “‘고요’는 정지된 상태 아닌 ‘찰나의 순간'”
루쉰이 사망했을 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함께 장례를 지냈다. 그때 루쉰의 관을 덮은 천에는 민족혼(民族魂)이라고 쓰여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루쉰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최진석 칼럼] 대한민국, 여기까지만 살다 갈 수는 없다
36년간의 식민지를 벗어나 신생 독립국으로 재탄생한 우리는 소란과 갈등 속에서도 찬란한 역사를 썼다. 경제, 정치, 문화, 학술, 사회, 과학 등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고, 세계는 이것을
[최진석 칼럼]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던지는 질문들
대학에서 학생들이 여러 가지 문제로 방황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상담하고 돌아갈 때 대개 이렇게 말한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기가 걷고
[최진석 칼럼] 문자를 지배하는 사람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다양한 반응을 하면서 비교적 일관되게 해석될 수 있는 활동을 한다. 그 활동을 ‘문화’라 하고 그 활동의 결과를 ‘문명’이라 한다.
[최진석 칼럼]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
평생 한 가지 일에 자신을 모두 바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말에서는 구도자의 기품이 느껴진다. 진실하게 자기를 모두 바치면 구도자가 된다. 어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출렁이는 바다와 헤밍웨이의
[최진석 칼럼] 도전적인 질문에서 선도적·전략적 역량 나와
오늘 우리 모두의 조국 대한민국은 혼란스럽다. 어찌 보면, 그리 새삼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줄곧 혼란 속에서 살아온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의식을 수행하면서 관점의 차이들로
[최진석 칼럼] ‘징비록’, 짧은 인생 값지게 하는 지혜
우리나라에는 <징비록> 같은 기록이 많지 않다. 물론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처럼 위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 이것들을 제외하면 기록물이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징비록>은 기록 문화가 돋보이지 않는